칩 설계(팹리스)와 위탁생산(파운드리), 메모리·로직 등으로 비교적 명확하게 구분됐던 글로벌 반도체 생태계 질서가 통째로 흔들릴 조짐이다. 인공지능(AI) 시대 관련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가운데, 고대역폭 메모리(HBM) 6세대 격인 HBM4가 이르면 2026년부터 본격적으로 양산에 돌입한다. 현재 시장에서는 5세대 HBM을 뜻하는 최신 HBM3E가 엔비디아 제품 등에 탑재, AI 붐을 이끌고 있다.
무엇보다 HBM4는 지금까지의 반도체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의 물건이 될 가능성이 크다. 19일 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HBM4부터 메모리 반도체와 로직 반도체를 동일한 다이(Die·둥근 웨이퍼를 이루는 사각형 조각들로 각각의 사각형이 회로가 집적된 칩)에 함께 구현하는 방식에 도전하기로 했다. 이미 개발 방향을 정하고 구체적인 사업 모델까지 추진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반도체 개발 역사상 처음으로 로직 반도체(GPU)와 메모리 반도체(HBM)가 완전히 붙어 한 몸처럼 움직이는 ‘주상복합 반도체’ 생산이 현실화한 셈이다.
현재 HBM과 같은 첨단 메모리 반도체는 로직 반도체인 GPU 칩 옆에 최대한 가까이 붙이는 방식으로 효율을 내고 있다. 로직 다이 위에 D램을 켜켜이 쌓아 올린 HBM이 올라가 있지만, GPU의 주요 연산 기능은 별도의 칩으로 HBM과 분리되어 있다.
최근 주목을 받는 첨단 패키징 기술 역시 메모리와 로직의 두 칩을 최대한 붙여 연결하기 위해 탄생했다. ‘인터포저’라는 부품 위에 메모리와 로직 칩을 수평으로 붙인 뒤 이를 배선으로 연결하는 식이다. 역설적으로 두 칩이 아직 완벽한 한 몸이 아니기 때문에 패키징 기술을 동원해 마치 하나의 칩처럼 연결해야 한다. 이에 통로 역할을 하는 배선을 늘리거나 HBM의 층수를 높이는 방식으로 성능 향상이 이뤄져 왔다.
하지만 HBM4를 시작으로 GPU의 주요 연산 기능이 본격적으로 메모리 반도체가 있는 로직 다이 쪽으로 옮겨와 HBM과 함께 구현될 것으로 보인다. 김정호 KAIST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비유하자면 아파트(메모리 반도체)와 상가(로직 반도체)로 나뉘어 지하도로 연결해야 했던 구조에서 마침내 진정한 의미의 ‘주상복합 반도체 시대’로 첫발을 내디딘 셈”이라며 “지금보다 2~3세대가 지나 발열 문제 등이 해결된다면 인터포저 없이도 HBM과 GPU가 한 몸처럼 작동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를 포함한 다수의 글로벌 팹리스 업체와 HBM4 설계 방식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SK하이닉스와 엔비디아가 처음부터 칩을 함께 설계해 TSMC에 생산을 맡기는 방식으로 반도체를 만들 가능성이 높다. 메모리 반도체와 로직 반도체가 동일한 다이에서 한 몸처럼 움직이기 위해서는 공동 설계가 불가피하다.
엔비디아의 왕좌를 노리는 주요 글로벌 팹리스들도 이 같은 공동 설계 디자인을 타진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SK하이닉스가 최근 로직 반도체 설계 공부에 나선 배경이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HBM 성능이 발전할수록 다이에 여유 공간이 생긴다”면서 “HBM의 빈 공간을 내어줄 테니 GPU도 이쪽으로 건너와 시너지를 내보자는 차원의 아이디어”라고 설명했다.
메모리 반도체와 파운드리까지 모두 손에 쥐고 있는 삼성전자 역시 설계단계에서 엔비디아 등 글로벌 팹리스와 협업을 진행한 뒤 HBM과 GPU를 자체적으로 각각 생산해서 한 몸으로 만들어주는 작업까지 일괄공급해줄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엔비디아와 같은 팹리스 업체가 쥐고 있는 하드웨어 패권이 메모리 업체로 일부 움직일 수 있는 ‘메가톤급 파장’이 벌어질 수 있다고 본다.
자칫 메모리·시스템·팹리스·파운드리의 역할과 영향력마저 뒤바뀔 수 있다. 메모리 반도체와 로직 반도체 영역 구분이 사라지기 시작한 첫 번째 칩으로 IT 역사에 기록될 가능성이 크다. 글로벌 HBM 시장은 올해 20억 달러(약 2조6000억원)에서 2027년 63억 달러(약 8조2000억원)까지 급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 HBM과 로직 반도체가 설계 단계부터 합쳐진다면 관련 시장 규모는 지금보다 몇 배 이상 불어난다.
IP(반도체 설계자산)와 공정 분야에서도 일대 변화가 불가피하다. ‘주상복합 반도체 시대’가 오면 메모리 반도체 업체가 주도권을 잡을 수 있을까. 업계 관계자는 “단순 맞춤형 ‘D램 파운드리’를 넘어 더 큰 세상이 열릴 수 있다”며 “엔비디아·AMD 같은 거물들도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만든 판 위에서 설계해야 한다는 뜻”이라 말했다.
이희권 기자 lee.heekwon@joongang.co.kr
Copyright©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취미, 건강, 세상 이야기 > 세상속 이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사업에의 리스크 (2) | 2023.12.02 |
---|---|
"제주 2박3일 비용이면 한 달 산다"...한파·고물가에 동남아 각광 (0) | 2023.11.26 |
중국 시진핑, 방미 및 미 기업인과 만남에 대한 기대 (0) | 2023.11.09 |
'특별귀화 1호' 인요한, 집권당 혁신위원장에 임명 (1) | 2023.10.23 |
교육부의 외국인 유학생 30만 명 증원 정책.. 제발 심사숙고하길 (0) | 2023.1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