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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을 택한 과학자 & 세째 외숙부

SaintShin 2022. 10. 19. 00:23

누나로부터 조선일보 2015년 5월 15일자 "통일이 미래다"라는 특집 기사의 13번째 기사 스크랩을 받았다. 내용을 보니 세째 외숙부가 포함된 미국의 우수 유학파들이 조국의 과학기술 중흥을 자신들의 모든 유리하고 미래가 보장된 삶을 포기하고 조국으로 돌아와 조국의 과학기술 발전에 실질적인 기여를 했다는 글이다. 이하가 기사 내용 중 일부를 발췌.

美, 한국의 월남 파병 감사 표시로 '응용과학연구소' 설립 지원키로
박정희 대통령 '유학생 유치' 특명… KIST소장, 설득 끝에 18명 선발


과학기술과 대한민국

1962년 11월 17일 토요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이승만 정권 때 만든 원자력연구소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과학자 우대 정책을 과감히 실시할 것이며 과학자들의 진지한 연구 분위기를 조성토록 하겠다." 조선시대 세종대왕 때 동래현 관노(官奴) 장영실이 측우기며 물시계를 발명한 이래 단 한 번도 권력층에게 인정받지 못했던 과학자와 기술자가 각광받게 되리라는 징조였다.

1969년 10월 30일 KIST를 찾은 험프리 전 미국 부통령과 최형섭 소장. 준공식 1주일 뒤다. /KIST제공


1965년 박정희가 과학자들을 청와대로 불렀다.
박정희가 말했다. "작년에 스웨터를 2000만달러나 수출했다."
듣고 있던 원자력연구소 소장 최형섭이 한마디했다. "기특하긴 하지만 언제까지 스웨터나 팔고 있을 건가. 일본은 작년에 전자제품을 10억달러나 수출했다. 문제는 기술이다."
한 달 뒤 미국 대통령 존슨이 한국군의 월남 파병에 대한 감사 표시로 박정희를 초청했다.
피츠버그 제철 공장에 들러서 박정희는 "단 한 개라도 이런 공장이 있었으면" 하고 읊조렸고, 플로리다의 케네디 우주센터에 가서는 창공으로 솟구치는 아틀라스 로켓을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봤다.
그리고 존슨이 선물을 줬다. "응용과학연구소 설립을 도와드리겠다."
이듬해 2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설립됐다. 스웨터 수출을 자랑하는 대통령에게 훈계했던 최형섭이 초대 소장에 임명됐다. 그곳에서 일할 과학자 유치는 최형섭이 맡았다.

조국을 택한 과학자들

최형섭은 "과학기술 개발은 개발도상국의 공업화와 국가 발전을 위한 가장 현명한 해결책"이라는 신념으로 일관한 삶을 살았다. 6·25 전쟁 후 미국 미네소타대 대학원에서 야금(冶金)으로 박사 학위를 딴 뒤 돌아와 이 신념을 종교처럼 퍼뜨리고 다닌 인물이었다.

그때 한국은 고학력자에게 줄 일자리도 별로 없었고, 있더라도 박봉에 연구 환경이 척박한 나라였다. 전쟁 후 1967년까지 해외 유학생 7958명 가운데 973명만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KIST 소장으로 임명된 그해부터 최형섭은 지구촌을 샅샅이 훑었다. KIST의 미국 측 파트너인 바텔연구소와 함께 해외 기관 500곳에 있는 한국 과학자에게 자료를 돌리고 연구원 지원서를 받았다. 지원자 800여 명 가운데 75명을 추려내 그해 10월 미국과 유럽에 가서 일일이 만났다. 유학생들은 연구 환경과 경제적 처우를 물었다. 최형섭이 대답했다.

"연구 환경은 보장한다. 모두 연구실장으로 일하며, 먹고살기에 안 불편할 정도로 대우도 보장한다. 그 대신 조건이 있다. 노벨상을 희망하는 사람은 응모하지 마라. 논문 쓸 생각도 마라. 연구 외에 돈 벌 생각도 마라. 우리는 나라를 먹여 살릴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최형섭의 카리스마 가득한 설득에 박사급과 산업계에 경력을 쌓은 석사급 18명이 최종 선발됐다. 전공은 기계·금속·재료·화학·식품·전기·전자 등 다양했다. 월급은 6만원에서 9만원 사이였다. 당시 국립대 교수 월급 3만원보다 훨씬 많았다.
계획서를 본 박정희가 말했다. "나보다 봉급 많은 사람이 수두룩하구먼." 1966년 월급 7만8000원이던 대통령은 최형섭 소장에게 "그대로 시행하라"고 지시했다.

 

1970년 1월 9일, 준공된 지 석 달이 채 되지 않은 KIST 광장에 연구원들이 모였다.

위 사진의 왼쪽 두번쨰 라인, 앞에서 세번째가 카네기공대에서 금속학을 전공하고 브라운공대에서 핵물리학 박사학위 취득한 세쨰 외숙부이시다.   1971~78년 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을 역임하고 국민훈장 동백장 수여 및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이기도 하다.

 

이들의 두뇌와 손에서 대한민국을 이끌 기술이 잉태됐다. 앞줄 왼쪽에서 셋째가 최형섭 초대 소장이다. 1977년 이 사진을 게재한 KIST 기록물은 “이미 2명이 세상을 떴다”고 설명을 달았다. /KIST 제공

하지만 국내에서나 최고였지 미국 연구소에서 받는 돈의 30%밖에 되지 않았다. 연구 환경도 척박했다. 그럼에도 안정된 미래를 버리고 사명감을 택한 과학자들이었다. 이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선진국에서 개도국으로 두뇌가 역유출된 첫 사례로 기록됐다. 


대한민국 건설에 핏줄이 되다

돌아온 과학자들은 텅 빈 연구실을 하나씩 배정받고 전원이 해당 분야의 연구실장에 임명됐다. 최형섭의 약속은 지켜졌지만 너무 웃겼다. 박사가 우글거리는 연구소에서 온 두뇌들인데 1박사 1실이었다. 그것도 기초 연구가 아니라 응용과학, 그러니까 산업에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작품을 내놔야 했다.



윤용구 사장 선임 / 1977.08.24일자 중앙일보


「한국 원자력 기술」한국원자력기술주식회사(KNE)는 23일 이사회를 열고 대표 이사장에 윤용구 박사(사진·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 수석부사장에 이해 박사(동부소장)를 각각 선임했다.
삼성중공업(주) 등 11개 사가 8백30만원씩을 출자, 자본금을 2억5백 만원으로 투자한 KNE는 원자로 설계, 고리3, 4호기에 대한 용역 수행 등 우리나라 원자력 발전소 건설사업을 이끌어가게 된다.

 

 

윤용구 박사, 김호철 박사 정년퇴임 / 1994.08.31일자 한경뉴스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윤용구 박사(65 원자력공학과)와 김호철박사 (65 물리학과)가 31일 KAIST 대덕 캠퍼스 대강당에서 정년퇴임식을 가졌다.
윤용구 박사는 한국원자력 연구소 소장(71~78년),한국원자력기술(주)대표이사,KIST 선임연구위원 책임연구원등을 역임하고 지난 85년 KAIST 원자력 공학과 교수로 부임해 교육및 가압경수로행 원전 연료봉의 파손 예측모델링과 성능해석코드연구,원자력 발전기기의 구조와 시스템의 신뢰성연구 등을 수행했다.

 

 

브란운대학 한국 유학생 중 최초 박사수여자가 되다.

 

◆Alumni / 외국대학 동문들 미국 브라운大 (上)◆


미국 동부 보스턴 남쪽에 위치한 '프로비던스'라는 작은 도시에 자리잡은 아이비리그 브라운대학은 1764년 설립된 브라운대학은 미국에서 일곱번째로 설립된 유서 깊은 대학으로 '전통 속에 자유와 변화'를 추구하는 대학이다.
"브라운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은 'Why be same?'이라는 질문을 학창시절 내내 가슴에 담고 살아간다"고 하며 유독 자주적 정신과 개척정신이 강한 졸 업생이 많은 것은 이 같은 학풍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브라운대학은 IBM의 토머스 왓슨, CNN의 테드 터너, 석유왕 존 록펠러 등 자수성가한 기업인을 다수 배출했다.

브라운대의 한인유학 역사는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초 졸업생은 1905년 졸업한 백상규 선생이며, 광복 후 첫 유학생은 박준규 전 국 회의장, 첫 박사학위 수여자는 전 원자력연구소 소장이었던 윤용구 박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