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현재와 미래의 세계 변화에 관심을 두고 여러 책과 SNS를 살펴 보다보니 자연스럽게 과거의 세계사 흐름과 한국사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더욱 내용을 파헤쳐나가게 되었다.
그러던 중 내가 알고 있던 일반적인 역사적 사실들이 오류가 적지 않았던 것을 꺠달았다.
단순히 학창시설에 책으로만 외우고, TV나 매스컴을 통해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것들이 실은 수박 겉핡기이자 극히 일부였던 것을 알고는 창피함마저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황현칠 한국사> 유튜브 강의를 통해 몇 가지 역사적 지식에 대한 오류를 바로 잡게되어 옮겨본다.
1. 이황과 이이, 그들은 과연 한국지폐에 넣을만한 위인인가 ?
결론부터 말하면 우선 이황과 이이는 조선의 대학자이자 정치인으로 조선중기부터 통치이념이자 생활기준인 성리학과 유교를 집대성하고 정착시킨 인물들이다.물론 유교사상에서 강조하는 예의와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개념은 높이 살만한 것이지만 지나친 형식주의로 인해 개인의 창의성은 시대와 단체에서 희생되어야 했으며 그로 인해 한국의 역사는 오히려 국제 정세에 뒤쳐지는 상황이 되었다고 본다.
성리학의 뿌리는 12세기에 여진족에게 중국대륙 절반을 뺏아기고 남쪽으로 쫓겨간 남송의 주희가 집대성한 유교의 주류 학파 (주자학이라고도 함)로 이미 16세기에 들어서는 주자학이 쇠퇴한 상황에서 오히려 조선에 주자학 즉 성리학을 뿌리내린 이들이 이황과 이이였다.
즉 성리학이라는 학문이 조선의 통치이념인 유교의 모태가 된 것이다.
강사는 이 성리학으로 말미암아 남존여비사상, 군신유의(한번 군주는 영원한 군주인 것이고, 한번 신하는 영원한 신하), 부부유별, 장유유서, 지나친 형식주의 등이 한국 근대화를 더욱 방해했고 일본의 식민통치까지 이르른 단초였다고 역설하고 있다.
또 16세기말 조선 사대부(사림)은 계파와 파벌이 생기며 붕당정치로 서로 반목하고 나라를 분열시키게 된다. 이런 반목이 임진왜란의 비극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게한 것도 사실이다.
16세기말에서 무려 19세기 초까지 이황이 중심이 된 남인과 이이가 중심이 된 서인이 학문의 옳고 그름을 논하며 정치적으로도 파벌조성과 경쟁을 했다
이황과 이이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이황은 명종때 관직생활을 하다가 윤원형 등 훈구파들의 득세에 실망하고 관직을 버리고 그후 27번의 관직제수를 물리치고, 왕옆에 많은 훈국척신들을 경계하며 왕 스스로 성학에 이를 수 있는 10가지 도리를 그린 <성학십도>를 남기고, 도산서원을 세워 제자를 양성하는데 힘썼다. 그의 제자로는 유성룡이 있다.
강사는 이황은 성리학을 기반으로 많은 제자를 기른 조선시대 대학자임은 사실이나 현대에 들어 한국을 발전시키는데에는 큰 기여가 없었다고 역설한다.
이이는 선조때 인물로 이황과 함께 조선 6현의 한 사람으로 엄마인 신사임당 사후 잠깐 승려생활을 했었으며 그 것이 두고두고 반대파의 공격거리가 되었다. 그는 이황과 달리 과거 시험 통과 후 그후에도 과거를 9번 치르며 관직생활을 계속했다.
유교(儒敎)
중국 춘추시대(기원전 770~403) 말기에 공자(孔子)가 체계화한 사상인 유학(儒學)의 학문을 이르는 말로, 동아시아 특유의 종교 및 철학 체계이다. 시조 공자의 이름을 따서 공교(孔敎)라고도 한다. 지켜야 할 인륜의 명분(名分)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하여 명교(名敎)라고도 한다.
유교의 특징 또는 핵심 사상은 수기치인(修己治人)으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은 후에 남을 다스리는 것으로서 위정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즉, 유교는 자기 자신의 수양에 힘쓰고 천하를 이상적으로 다스리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학문이며 또한 그것을 향한 실천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내용은 신분의 존비와 인애(仁愛)를 근본으로 하면서 수신(修身) · 제가(齊家) · 치국(治國) · 평천하(平天下)의 길을 가르치는 일종의 정치학 · 윤리학이다. 따라서 유학이라고도 한다.
유교는 춘추전국시대 이후 한나라, 당나라, 송나라, 명나라, 청나라 등 고대 및 중세를 거쳐 변함 없이 중국의 대표적 이데올로기였다. 일시적으로 도교나 불교가 국가 핵심 이념이 될 때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근본은 유교였다. 유교는 고대의 훈고학적 유교를 거쳐 송나라 때 신유학과 도교의 형이상학적 개념을 받아들여 주자와 정자에 의해 성리학으로 발전하였다.
성리학은 한국으로 건너와 조선왕조의 국가 이데올로기로서 자리잡는 등 한국에 큰 영향을 주었다. 명나라 때는 사변적인 성리학에 대한 반발로 왕양명에 의해 양명학이 등장하였다. 양명학은 사물의 이치를 파악 이전에 마음의 선천적인 앎의 능력인 양지(良知)를 강조하였다. 조선 후기 북학파, 실학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강화도를 중심으로한 강화학파의 학문이기도 하였다.
청나라에 이르러 객관적인 증거에 의한 실증적이고 귀납적인 연구를 강조하는 고증학이 크게 흥기하였다.
유교는 동북 아시아, 즉 한국과 일본 등 중국의 인접 국가를 비롯한 나라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쳐 특히 한국의 경우 삼국시대 이후 고려를 거쳐 조선 왕조 때에는 국가 지배 이념이 되었다.
2. 조선을 망하게 한 민비, 명성황후란 호칭은 가당치 않다는 역사가들의 평가
민비에 대해선 "명성황후"라는 뮤지컬과 조수미의 "나 가거든"이란 노래가 유행하면서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겐 민비가 비운의 여인이자 그가 일본 사무라이들에게 죽을 때 "내가 이 나라의 국모다"라고 외쳤던 의연하고 훌륭한 왕비로 기억하겠지만, 역사 강사인 황현필씨는 이 민비를 한국 역사의 5대 악인 *(주1)중 한 명으로 지명할만큼 그 시대 자신의 일신과 권위를 위해 시아버지인 대원군과 싸우고 잘못된 판단과 실정으로 백성과 나라를 도탄에 빠지게 했으며 결론적으로 대한제국이 일제 식민지가 되도록 한 결정적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그렇기에 그를 현대에 사는 우리 후세들이 명성황후라고 부르는 것은 지나친 미화이고 부적절하다고 한다.
명성황후는 1895년 10월 8일 시해되고 난 후 이 년후인 1897년 고종이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한 후 민비를 명성황후로 칭한 것이지 백성들이 그의 치적을 기리기 위해 칭한 게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민비의 대표적인 실정은
첫째, 민비는 미신을 신봉하여 궁에 무당을 불러 굿을 수시로 했는데, 심지어 총애했던 천민출신 무당에게 진령군이라는 벼슬을 주어 비선실세 노릇을 하며 재물을 긁어 모으고 국고를 탕진하게했다.
더구나 당시 심신이 허약했던 순종의 건강을 위해 진령군과 전국 8도를 돌아다니며 제사 지내며 명산마다 쌀을 뿌리고 하루 천금이나 되는 비용을 지출하며 내수사가 지불 불능에 빠지게 했다.
대원군이 지난 10년간 호포제 (양반도 군대를 가거나 군면제시 그에 상응한 세금을 내는 것) 등을 통해 국가 재정을 불려놓았으나 민비가 불과 1년 만에 탕진한 것...
둘째, 민비는 질투가 심해 고종의 다른 아들인 완친왕, 의친왕의 생모들을 궁궐 밖으로 내쫓았다.
셋째, 대원군이 집권 10년만에 물러난 후 실권을 잡으며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많은 벼슬아치를 내쫓고 자신의 친인척들을 천거하며 세도정치를 부활했다. 이를 민씨척족정치라고 한다.
넷째, 결국 이런 세도정치와 민씨 일가의 매관매직이 성행하면서 세금을 마구 걷어 들이고 뇌물도 받으면서 조선이 망하는데 일조를 했고 조선이 망한 후에도 친일파가 되어 호의호식했다고 한다.
다섯째, 이 민비일파들의 국고 탕진으로 군대에게 13개월 동안이나 봉급을 주지 못했고 그나마 나중에 준 봉급인 쌀에 썩은 쌀과 모래를 섞어 백성들의 원성을 사게 되었다. 결국 군대는 봉기를 일으켜 "이게 다 민비떄문이다"라며 민비 오빠인 민겸호, 민태호를 쳐죽이고 민비도 죽이고자 했으나 - 이 것이 임오군란 (1882년)임 - 민비는 재빨리 도망가서 목숨을 부지했다. 결국 이때 민비는 청나라를 불러 들여 구식군대를 쳐부수게 하고 대원군은 청나라로 압송하며 민비가 재집권하게 된다.
여섯째, 이후 민비의 실정을 보다 못한 김옥균 등 급진개혁파들이 혁명을 일으켜 개혁정부를 세웠으나 (갑신정변, 1884년) 다시 한번 민비가 청나라를 불러 들이면서 개화파는 삼일천하로 실패하고 쫓겨나서 숨게되었는데 민비는 자객들을 보내 이 개혁파들을 차례로 죽였다.
심지어 임오군란 때 자신이 도망가며 들렀던 주막에서 민비인 줄 모르고 민비의 실정을 비판히며 자신을 욕한 주막주인 조차도 찾아내 죽였다고 한다.
칠곱째, 위와 같은 상황에서 점점 더 백성의 삶이 피폐해진 상황에서 군대와 개화파마저도 실패하자 일반 농민들이 민비와 민씨 일파의 행패를 보다 못해 민씨친족규탄을 주장하며 반봉건, 반외세를 외친 동학농민운동 (1894) 을 일으켰다. 이때 민비는 일부 조정대신들과 심지어 민씨 척족들이 텐진조약의 위험성을 들어가며 반대를 했는데 결국 이를 무시하고 청의 군대를 불러 들였다.
여덟째, 결국 청의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한 조선 진입은 청과 일본간의 텐진조약 (1885) - 갑신정변 이후 청과 일본이 체결한 조선에 대한 공동파병, 공동철병 조약- 에 의해 자연스럽게 일본군 마저 들어오게 되었다.
이에 당시 동학군은 조선에 외국 군대가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외세에 빌미를 주게 될 것과 그로 인한 궐기 목적의 변질을 두려워해 바로 전주 화약을 맺고 해산하게 되고 조선조정은 청과 일본에 철병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애시당초 일본은 그럴 생각이 없었던지 일본군 수천명을 제물포에 상륙시키고 한양으로 진군해 갑오개혁을 요구하는 등 점점 내정 간섭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더니 급기야 7월 23일 경복궁을 점령해 버렸다. 결국 이 것이 청일전쟁을 불러 일으키고 일본이 조선을 식민통치에 이르게 한 단초가 되었다.
역사적으로 민비는 처벌받아 마땅했으나 그 심판과 벌 집행은 우리 민족이 주체적으로 했어야 하거늘 일본은 자기들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였고 민비에 대한 보복과 조선 내각의 친일파의 세력을 공고히 하기위해 1895년 10월 8일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훈련대 2대대장 우범선의 도움으로 경복궁에 난입해 민비를 유린했다는 건 (을미사변) 분명 잘못된 것이다.
특히나 당시 한중정부고문이라고 했던 이즈시카 에이조가 일본의 법제국 국장 쓰에마쓰에게 보낸 보고서가 일본 국회도서관에 보관중인데 소설가인 김진명씨가 가서 직접 확인한 바에 의하면 "문을 열고 민비를 끌어내 칼로 두세군데 상처를 입힌 다음 발가벗겨 국부검사를 했다. 그리고 기름을 부어 소실했다"라고 쓰여 있다.
이에 대해선 아직도 역사학자들 중 이 건 증명되지 않은 지어낸 것이라고 말하는 자들도 여전히 있다.
어쨋든 결국 민비의 실정이 얼마나 백성을 힘들게 했으면 구식군과 백성들이 봉기하며 한 나라의 왕비를 죽이라고 했겠나 ?
그는 그 만큼 한국의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른 사람이었다... (황현의 매천야록 중)
'취미, 건강, 세상 이야기 > 재미로 보는 세상 (취미 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머) 직급별 개의 표정과 세상에서 가장 비싼 벽 (0) | 2022.10.22 |
---|---|
책) 이게 다 심리학 덕분이야 (0) | 2022.10.21 |
신사임당과 허난설헌 (1) | 2022.10.15 |
부자 이야기: 권력과 시대적 환경 (1) | 2022.10.15 |
진의 흥망성쇠- 創業과 壽城의 교훈 (1) | 2022.1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