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와 권력은 상호 보완적이면서 때론 상호 대립적이다.
권력은 부자를 등에 업고 세력을 구축해가기도 하고, 한편으론 부가 권력가의 비호를 받아 크기도 한다.
그러나 때론 권력자가 자신을 후원하던 부자마저 하루 아침에 제거하기도 하고,
부자가 절대 권력자의 반대편을 지원함으로써 하루 아침에 권력구도를 바꾸는 것을 역사를 통해 많이 보았다.
한편, 중국의 아편전쟁 전과 후에 각각 당시 조선과 청나라에서 대부호가 탄생하였으니 조선의 임상옥과 청나라의 오병감이 그들이다.
이들은 확실히 시대적으로 위기의 순간에 그 기회를 잘 활용하는 지혜로운 사람이었으나
조선의 임상옥은 스스로 욕심을 절제하고 한참 전성기에 전 재산을 사회환원하고 시와 풍류를 즐기며 살았으나
청나라 오병감은 그가 축적한 재산이 한때 전세계 1000년 역사에 세계 500대 부자반열에 들었으나, 아편전쟁을 거치며 자신의 부를 지키려 무척 노력하였으나 오히려 그의 부가 청나라 정부나 세인들의 시기를 사고 오히려 몰락하게 되었다.
최근 기업가들에게 ESG (Environmental, social and corporate governance, 환경, 사회, 기업지배구조)가 경영의 기본철학으로 대두되었다.
환경적 측면에서 기업이 기후위기와 자원고갈에 대응한 원자재 감소, 신소재/신제품 개발/생산/유통의 노력과
사회적 측면에선 인권, 소비자보호, 동물복지, 다양성(인재풀)로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하며
지배구조 측면에선 비즈니스윤리, 반경쟁관행, 부패, 세금 측정 및 이해 관계자에게 회계 투명성 제공이 포함된다.
여기 한 시대를 풍미했던 부자들의 사례를 보면 사업의 기본을 배운다.
조선의 거상 임상옥,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다
임상옥(林尙沃, 1779~1855)은 조선 중기 무역 상인으로 조선의 인삼과 홍삼을 청나라에 팔아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인물이다. 그는 역관을 목표였으나 시험에 실패하며 이후 중국과 무역거래를 하는 상인에게 돈을 빌려 금수품을 챙기고 밀무역을 하여 돈을 벌었던 아버지에게서 중국어를 배우고, 부친 사망 후 일가와 함께 관노가 되었는데 후에 임상옥은 만상(의주에서 중국과 무역거래를 하는 상인) 사환으로 들어간 후, 그 능력을 인정받아 밀무역을 하며 자신의 상인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의 강점은 소위 말솜씨와 타이밍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 그는 시대적 상황과 목표시장에 맞는 자신만의 하트상품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판로를 개척하고 또한 배포와 인내를 장착하고 고객과 중간상들을 상대하며 부를 축적했다.
당시 중국은 청나라 말기로 백성들이 아편에 쩌들어있었으며, 백성들이 더 많은 아편을 피우기 위해 조선의 인삼과 홍삼을 필요로 할 때 조선의 인삼/홍삼이 좋은 상품이 될 거라는 것을 간파하고 인삼무역독점권을 따기 위해 당시 조선의 권세가인 이조판서이자 인삼독점권을 평가하는 박종경에게 접근했다고 한다. 특히 그는 박종경 부친상을 좋은 기회라 생각하여 백지수표를 내고 돌아온 후 이후에 박종경의 부름을 받고 조선의 인삼무역 독점권을 딴다.
그는 어느날 인삼을 아랫목에 두었다가 홍삼으로 변한 것을 보고, 역시 당시 중국에선 장수를 위한 최애식품이던 홍삼을 만들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 끝에 홍삼을 개발하여 청나라에 상단을 이끌고 무역을 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청나라의 상인들은 점점 그의 홍삼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청나라의 상인이 홍삼 값을 낮추기위해 단체로 담합(불매동맹)을 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홍삼을 가지고 사람들이 보이는 시가지에서 불태웠는데 담합을 하던 청나라상인들은 인삼과 홍삼 매물이 줄고있다고 인식하여 결국 임상옥이 부르는 10배의 값에 구매하게 되었다.
임상옥은 다른 상인과는 달리 돈보다는 사람 위주로 돈을 썼다고 한다.
대표적인 일화로는 만상 아래에서 있을 때 청나라에 가서 돈을 벌고 돌아가기 전 어느 숙박소에서 한 여인이 부모에게도 버림받고 팔린 신세라고 구해달라고 빌자 그는 청나라에서 벌은 돈(현재가치로는 수천만원상당)의 돈을 주며 숙박소 주인에게 여인을 사고 풀어주었는데 나중에 이 여인은 어느 한 부유한 상인의 정실부인이 되고 임상옥이 자신의 상단을 차리고 베이징에 왔을때 여인의 남편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여인을 구해줬던 비용의 갑절의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계영배(戒盈杯)라는 것이 있다. 가득 차는 것을 경계하는 술잔이라는 뜻이다. 과음을 경계하기 위해 술이 일정 이상 차오르면, 술이 모두 새어나가도록 만든 잔으로 절주배(節酒杯)라고도 한다. 이 잔에는 과유불급(過猶不及) 즉 인간의 끝없는 욕심과 지나침을 경계하는 선조들의 교훈이 담겨 있다. 조선 순조때 도공이었던 우명옥이 이름을 얻게되자 방탕과 교만에 빠져 방황하다 반성하고 스승에게 돌아간 후 만들어 바쳤던 계영배는 당대 최고의 거상인 임상옥(林尙沃, 1779;1855)에게 전해졌고, 그는 이 잔을 늘 곁에 두고 인간의 과욕을 경계하면서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거상으로 거듭났다고 한다.
그의 어록 중 되새겨야 할 것들은
"사람은 신의를 가지고 바르게 대해야 한다."
"장사라 이윤을 남기기보다 사람을 남기기 위한 것이다. 사람이야말로 장사로 억을 수 있는 최고의 이윤이고 신용이야말로 장사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자산이다"
한상(韓商)은 해외에서 비즈니스를 운영하고 있는 재외동포를 일컫는다. 국적에 관계없이 한민족 혈통을 갖고 있는 기업인들이다. 최근엔 글로벌 기업에 종사하고 있는 경영인으로까지 한상의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세계한상대회는 전 세계 한상 기업들을 연결하는 글로벌 네트워크를 만들자는 취지에서 2002년 시작됐는데, 한상의 뿌리는 멀리 신라시대 장보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세계 최고부자 50인 중 한 명, 포브스의 양아버지 오병감(伍秉鑒, 우빙젠)
2001년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은 1000년동안 세계에서 가장 부유했던 50인을 선정한 적이 있는데, 6명의 중국인(징기스칸, 쿠빌라이, 유근, 화신, 오병감, 송자문) 중 한 명이 오병감이다.
17세기 후반에 강희제는 일시 대외무역금지정책을 완화하며, 이에 따라 중국에 와서 무역을 하는 외국상인들이 늘어난다. 광동지방정부는 1686년에 13개의 실력있는 상인들을 모아 그들에게만 서양상인들과 대외무역 독점권을 주었으며 매년 일정한 백은을 납부하도록 했다. 이 것이 근대 중국역사상 유명한 "광주십삼행(廣州十三行)"이며 오병감의 부친은 이때 이화행(怡和行, Yí hé xíng)을 설립하고 외국인과 차와 도자기를 무역거래하며 청나라 시기에 엄청난 부를 쌓게 되었다.
오씨 일가는 거래의 대가로 오직 백은만 받았다고 한다. 오국영은 이 때 , 스스로를 호관(浩官)이라고 칭하였는데, 호관이라는 칭호는 그 이후 자손들도 계속 이어서 사용하게 되며, 1800년대초기에 국제상업계에서 유명한 이름이 된다.
오병감(1769-1843)은 32세때인 1801년에 부친으로부터 이화행의 업무를 승계받는다. 이후 오씨 집안의 사업은 신속히 발전한다.
그는 청나라 연간 재정수입의 절반 정도인 백은(白銀) 약 2800만냥을 쥔 세계 최고의 부자로, 당시 미국 최고 갑부의 재산은 700만냥 정도로 그 4 배의 부를 축적한 것이다.
1820년 중국의 GDP 규모가 세계 전체 GDP의 33%를 차지했으니 그럴만했다. 당시 유럽 전페의 GDP규모가 27% 수준이었다.
1757년(건륭22년)에 청나라정부는 쇄국정책을 시행하면서 단지 광주에만 대외통상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즉 광주십상항이 당시 중국에서 유일한 합법적인 대외무역특구로서 이들 상인들에게는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되고 그 이후의 100년간 광동십상함은 청나라정부에 40%의 관세수입을 제공했다. (십삼행은 실제 단지 통칭이고, 많을 때는 수십개에 달하였고, 적을 때는 4개인 적도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1822년 광동십삼항이 있는 거리에 대화재가 발생한 적이 있는데, 4000만 백은의 가치가 있는 상품이 불에 탔다고 한다. 광동십삼항에서 동문행(同文行), 광리행(廣利行), 이화행(怡和行), 의성행(義成行)이 가장 유명했다. 그 중의 이화행은 특히 그 주인인 오병감으로 인하여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
아편전쟁 발발, 오병감의 몰락
그러나 그때 중국은 아편으로 전국이 물들어 가고 있었다.
전쟁 발발 당시 영국에 대한 중국의 최대수출품은 차(茶 71%), 비단 22%, 도자기 7% 이었고, 영국의 주요수출품은 모직물과 인도산 면화였다. 양국의 무역수지는 중국의 수출초과 상태가 지속되었기 때문에, 영국으로서는 차 수입을 결제할 은(銀)이 부족했다. 이에 따라 영국은 중국에 아편을 수출해 무역적자를 해소하고자 했으며 그 부족자금을 인도의 아편을 수출하여 메꾸기 시작하였다.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중국의 하층민들 사이에서 아편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아편에 중독된 중국인들로 인해 '동방의 병든 남자'라는 뜻의 동아병부(東亞病夫)라는 말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이에 청나라는 임칙서를 내세워 강력한 아편 단속 정책을 펼치고 마약상들을 홍콩으로 쫓아냈다.
영국은 청나라의 아편 단속에 반발하며 '무역항을 확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1840년 6월, 영국원정군은 주강입구를 봉쇄하고, 아편전쟁이 발발한다.
이 전쟁은 1842년에 영국의 승리로 끝났고, 난징조약이 체결되었다.
난징조약으로 영국은 홍콩섬을 할양받고, 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 등 다섯 개 항구를 강제적으로 개항시켰으며 전비배상금으로 1200만 달러와 몰수당한 아편의 보상금으로 600만 달러를 영국에 지불하고, 행상 즉 공행 등 독점상인을 폐지하며 수출입 상품에 대한 관세율은 양국이 협의하여 결정하기로 했다. 홍콩과 마카오가 좌측통행을 하게된 시발점이기도 하다.
아편전쟁이 시작되면서부터, 오병감은 중국의 승리를 위해 막대한 자금을 정부에 기부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인들과 장사를 하던 행상들은 중국인들에게 '매국노'로 찍혀버렸다. 그들이 얼마나 많은 돈을 기부하든지간에, 이 낙인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고 돈을 내고 평화를 구걸하는 것도 열혈애국자들의 뜻과는 어긋났다. 이것은 치욕이고, 당연히 그 질책은 협상에 가담한 오씨집안과 십삼행의 행상들에게 돌아갔다.
오병감의 세계 대부호가 될 수 있었던 비결
첫째, Blue Ocean 사업을 독점적으로 잘 실행한 것으로 그의 집안이 중국 정부로부터 대외무역 독점지위를 인가받아 이화행을 설립하고 무역을 한것이다.
둘째, 현금 장사
그들은 대외무역을 하면서 오로지 백은만 받았다고 하니 이 것이 사업에 있어서 Cash Flow를 담보하는 것.
셋째, 구미 각국의 중요한 고객들과 밀접한 관계 유지를 했던 것
1834년이전에 오씨집안은 영국상인 및 미국상인들과 매년 거래하는 무역액이 100만은원에 달하였다. 오병감은 당시 영국동인도회사의 최대채권자였고 동인도회사는 자금운전이 원활하지 않으면 오씨집안에 차입을 요청하였었다. 이로 인하여, 오병국은 당시 서방상인들에게 매우 높은 지명도를 지니고 있었다. 일부 서방학자들은 천하제일부자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넷째, 공급제품의 최고 품질 유지
당시 유럽상인들은 차의 품질에 대하여 매우 까다롭게 굴었는데, 오병감이 공급한 차는 영국회사에서 최고의 차로 감정받고, 높은 가격에 팔려나갔다. 이후 포장후 오씨집안의 표기가 있는 차는 국제시장에서 높은 가격을 받고 팔 수 있게 되었다.
다섯째, 사업의 다각화
오병감은 국내에 부동산, 차원, 점포등을 가지고 있었을 뿐아니라, 대담하게 미국의 철로에도 투자하였고, 증권거래, 보험업무등에도 손을 뻗었다. 이로서 이화행은 명실상부한 다국적기업으로 성장하였다.
여섯째, 오병감의 대범함과 배려심
소문에 의하면 미국 보스톤의 한 상인이 오병감과 하나의 사업을 공동으로 하였는데, 경영이 잘 되지 않아, 오병감에게 7.2만달러의 채무를 지게 되었고, 그 미국상인은 이 빚을 상환할 방법이 없어서, 미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오병감은 이 사실을 안 후에 차용증을 가져오게 해서 보스톤상인의 면전에서 찢어버리고, 더 이상 채무는 없다고 선언하였다. 이후 오병감의 명성은 미국에까지 알려지게 되고, 당시 미국에서 건조된 상선 하나는 아예 이름을 오호관(伍浩官)이라고 명명하였다. 그의 시원시원한 성격은 해외에 유명했다고 한다.
일곱째, 후계자 양성
오병감은 미국 철도사업에도 진출했다고 하는데 일찌기 오병감은 슬하에 자손이 없어 젊은 미국인을 양아들로 입양했는데 그가 바로 포브스 가문의 원조, 존 머레이 포브스였다. 그는 오병감 밑에서 장사를 배우고, 중국 무역에서 큰 돈을 벌었습니다. 그리고 이 때 번 돈을 가지고 미국으로 돌아와 훗날 "철도왕"이라고 불리게 되는 기반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또 그는 당시 미국의 노예해방 등 개혁에 관심을 두면서 아브라함 링컨을 후원했다는 것이다.
오병감의 몰락과 19세기 중국의 "치욕의 시대" 시작
1842년, 아편전쟁에서의 중국 패전의 결과는 오병감과 십삼행이 부담했다.
<난징조약>의 제4조 내지 제7조에 따라 중국이 영국에 2100만냥의 은원을 배상하여야 하는데, 이는 1470냥백은에 해당했다. 이때 청나라정부의 국고에 남아 있던 은은 겨우 700만냥에 불과했다. 광동십삼행은 청나라정부의 착취대상이 된다. 이번의 배상금에서 오씨집안은 100만냥, 행상공소에서 134만냥, 다른 행상들이 66만냥을 나누어 부담하였고
광주행상은 더 이상 무역을 독점하지 못한다. 5개의 항구가 개방되었고, 십삼행의 무역특권은 더 이상 존속하지 못하게 되었다.
13년후, 다시한번 아편전쟁이 일어나고 광주십삼행은 전쟁터가 된다. 그해 12월 15일, 170년역사를 지닌 상관은 포화속에서 사라진다. 십삼행은 철저히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된다.
오병감은 서양인들과 가까웠고, 너무나 큰 부자였기에 청나라 조정과 관료들로부터 불신을 사게 되었고 또 그를 시기하는 사람도 많았기에 결국 국가의 간섭과 경쟁자들의 음모 그리고 아편전쟁의 패배라는 국가적 상황의 변화로 몰락하게 되었다.
그는 당시 세계 최대의 부호 중 하나였고 세계를 알았던 유일한 중국인이었으며 미국 제일가는 부자보다 4배 이상 월씬 부자였고 영국/미국/인도 등지에도 다양한 사업파트너를 보유했던 대상인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중국이 변화하는 세계정세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오병감의 경영지식과 축적된 상업자본을 재생산할 기회를 주지 않았기에 19세기 말 중국의 모습은 치욕의 세기로 남게 되었다.
어찌보면 역사는 돌고 도는 것
지금 미국과 중국이 완전 앙숙처럼 경제, 군사, 과학기술 등에서 패권을 쥐고 싸우고 있는데 알고 보면 미국의 발전에 중국이 상당 기여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
원말명초 중국 최초의 국제무역상, 심만삼(沈萬三, Shěnwànsān)
원나라 말기에서 명나라 초기까지 중국, 아니 세계를 주름잡았던 대부호 심만삼(沈萬三)의 본래 이름은 심부(沈富)이다. 그는 원나라 말엽인 1328년 절강성 오흥(吳興) 지방, 지금의 후저우(湖州)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그가 태어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고장에서 뜻하지 않은 수재(水災)가 발생하여 전염병이 창궐하였고, 이로 인하여 그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버지 심우(沈祐)는 한밤중에 네 아들을 배 한 척에 싣고 백리 떨어진 주장(周庄;저우좡)으로 이주하였다. 그곳에서 첫째, 둘째 아들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심만삼 부자는 온 사방이 황무지에 불과했던 ‘주장’ 지방에서 성실하게 개간하고 경작지를 늘여가면서 부를 쌓아갔다. 부친이 세상을 떠난 뒤 심만삼은 더욱 부를 축적하였고, 그의 명성은 널리 퍼져났다. 그는 주장 지역을 상품 무역과 유통의 기지로 삼았고, 황무지 변방에 불과했던 주장은 그의 존재로 인하여 크게 번성하였다. 상하이 부근에 위치한 ‘저우좡’은 오늘날 유명한 관광지로 부상하고 있는데, 이곳에는 심만삼을 기념하는 여러 흔적이 남아 있다.
강남 부호에서 전국 부호로
이 무렵 소주(蘇州) 지방의 대부호이자 노장(老莊) 사상에 심취해 있던 육씨(陸氏)는 심만삼이 재능이 있고 총명하며 신용할 수 있는 인물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심만삼에게 자신의 딸을 결혼시킴과 동시에 모든 재산을 넘기고 홀연히 도사(道士)가 되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강변에서 표일한 삶을 누렸다.
더욱 큰 재산을 보유하게 된 심만삼은 대운하를 비롯해 수로(水路) 교통이 발달된 소주와 자신이 축적한 부를 발판으로 삼아 중국의 비단과 자기, 곡식 그리고 수공예품 등을 해외로 운송하고 해외의 보물, 상아, 코뿔소 뿔, 향료, 약재 등을 중국에 들여왔으며 이를 통해 중국 역사상 최초의 국제무역상으로 평가받는다. 이렇게 하여 그는 강남 제1의 부호 그리고 당연히 전국 제1의 부호가 되었다.
명 태조 주원장과의 악연
세계 최대의 대제국 원나라도 말기에 들어서면서 반란이 빈발했다.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남부 지방에서 반란은 더욱 거셌다. 그중에서도 소주 출신의 소금 장수 장사성(張士誠)이 반란을 일으켜 소주를 점령한 뒤 칭왕(稱王)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이미 강남의 대부호로 부상해 있던 심만삼은 장사성에게 여러 차례 거금을 내 지원하였고 군비도 지원하였다. 장사성은 심만삼을 크게 신임하였고, 그는 이러한 신임을 바탕으로 대외 무역과 부동산업에 대대적으로 투자하였다.
이 무렵 주원장(朱元璋)이라는 새로운 강자가 출현하여 전국적인 반란의 지도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원나라를 무너뜨리면서 명나라를 건국하였다. 그가 바로 명나라 태조 홍무제(洪武帝)다.
홍무제가 아직 천하를 석권하기 전에 장사성이 장악하고 있던 소주를 공격했다. 그때 소주는 무려 8개월이나 버티면서 주원장을 몹시 괴롭혔다. 그 배경에 소주의 막강한 경제력이 있었고, 특히 심만삼의 엄청난 재력이 크게 뒷받침되어 준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홍무제 주원장에게 소주의 부자들, 특히 심만삼은 증오의 대상이었다.
이를 눈치 챈 심만삼은 장사성에게는 비밀로 하면서 주원장에게도 자금지원을 했다.
그런데 이 홍무제 주원장은 천성이 본래 사람을 믿지 않고 의심이 많았다. 더구나 그는 상인을 특히 싫어하였다. 주원장은 뒷날 정책적으로 상업을 극도로 억압하여 농민은 비단과 면 그리고 명주와 무명의 네 가지로 만든 옷을 입을 수 있도록 한 반면, 상인은 오직 명주옷과 무명옷 두 가지만 입을 수 있도록 특별히 규정하였다. 상인은 과거시험과 관리가 되는 데에도 많은 제한을 받았다. 모두 상인을 천시하고 상업을 억제하려는 뜻이었다. 여기에는 아마도 소주에서의 경험이 작용했을 듯하다.
과유불급,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천하의 새로운 패자, 주원장은 남경(南京)에 정도(定都)하고 홍무문에서 수서문에 이르는 10km의 성곽을 수축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수십 년 이어진 전란으로 재정이 이미 철저하게 바닥난 상태였다.
소주 전투 때의 악연으로 주원장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혀 있던 심만삼은 이 기회에 그의 마음에 들고자 거금을 투척하가로 하고 남경 성곽 전체 공사의 3분의 1을 자신이 맡았고, 성곽만이 아니라 도로, 교량, 관저 공사도 자신의 재산을 털어 추진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성곽 축조에 주원장은 누가 수리한 성벽이 더 좋은지 심만삼과 내기를 걸었던 것인데, 그는 전국 최고 수준의 기술자를 대거 고용하고 동원된 사병들에게 격려금까지 주면서 최고 수준의 공사를 시행하였고, 공사 기간도 크게 줄였다. 그래서 주원장 자신이 직접 지휘해 진행했던 성곽 공사보다 3일이나 빨리 완공하게 되었다.
심만삼의 이러한 행동은 오히려 주원장의 체면을 크게 깎아내리는 일이었다.
명나라 문학가 전예형(田艺蘅)이 쓴 ‘유청일지(留青日札)’에 따르면 주원장이 군의 사기를 진작시키고자 전군에 대한 포상을 고민하고 있을 때 심만삼이 금전적인 비용을 부담하겠다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주원장은 “아무리 자네가 대부호라고 할지라도 짐의 군대가 백만인데 어떻게 다 감당할 수 있는가?”라며 심만삼에게 되물었다.
이에 심만삼은 “병사 한 명당 은 1량씩 하사 하신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라며 호탕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자 주원장은 마침내 대노했다. “필부가 감히 천자의 군대를 대접하다니, 이는 결단코 반란을 꾀하는 난민(亂民)이로다! 당장 끌어와 주살하렸다!”
이때 옆에 있던 황후가 주원장이 너무 지나치다 생각하고는 “상서롭지 못한 백성은 하늘이 반드시 주살할 것입니다. 구태여 폐하께서 나서서 주살하실 필요는 없지요”라고 말렸다.
이런 일들이 지속되면서 주원장은 심만삼을 호시탐탐 주살할 기회를 보다가 마침 조정 연회시 주원장이 식탁위에 놓인 홍샤오 돼지족발(红晓猪蹄, 홍샤오쭈티)을 가르키며 삼만삼에게 이 요리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물었다. 이 때 심만삼은 순간적으로 자신을 위해하기 위한 구실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만삼제(万三蹄, 완산티, 만삼족발)라고 대답하여 순간적으로 위기를 넘기고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그의 최후는 쓸쓸했다. 그가 명나라 초기에 남경성을 건축한 공으로 주원장은 그 두 아들을 황실의 고위관리로 임명했는데 훗날 두 아들이 비리사건에 연루돼 심만삼은 운남(云南)으로 두 아들은 차오저우(潮州)로 귀양을 갔다. 물론 그의 재산은 모두 몰수되었고, 그의 증손과 사위가 반란사건(남옥사건)에 연루돼 일가 전체가 몰살을 당했다. 그는 비록 죽음은 면했지만 다시 재기할 희망도 포기한 채 운남에서 쓸쓸한 여생을 보내다 굶어 죽었다고 한다.
심만삼이란 이름은 중국에선 부자의 상징으로 통한다. 지금도 강소, 절강, 복건 등 지역에서는 보통 돈 많은 사람을 ‘심만삼’이라고 비유하는 습속이 여전히 남아있다.
또 다른 글에서는 그의 죽기까지의 모습은 무역상의 면모를 보였다는 얘기도 있다.
그는 혈혈단신 빈털터리로 천리타향 운남에 유배되었지만, 그의 탁월한 사업 수완은 마지막 순간까지 발휘되었다. 바로 운남 지방의 험준한 차마고도(茶馬古道)를 이용해 강남(江南) 지역에서 생산되는 비단 등 특산품을 운남 지방에 들여와 교역을 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다시 티베트와 미얀마, 나아가 멀리 인도까지 이어졌다는 후문....
* 주원장은 명나라 건립 후 부정부태일소로 국가기강을 세우는 일을 하게 되는데 소위 부정부패한 관리, 오만하고 거만하며 백성위에 군림하는 관리, 분수에 맞지않게 많은 재물과 권력을 탐하는 관리들을 무소불위의 사찰기구인 <금의위>를 통해 사찰하고 Death Note에 적어 "관료를 두렵게 하는 정책"을 폈는데 부패한 관료들은 능지처참, 성기자르기, 박피, 진초 (오장육부를 들어낸 후 풀로 채워 인형을 만듦), 모기에게 물려 가려움증으로 죽게하는 호유랑으로 벌했다.
그는 30년 제위기간동안 무려 10만명에 달하는 공신, 대신, 관료, 군인들을 숙청했다.
그가 무서워한 사람은 오직 그의 아내, 마황후뿐이었다고 한다.
이에 개국공신이었던 탕화는 그는 주원장에게 편지를 써서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지휘할 수 없으니 관직을 떠나 시골에 내려사 묘자리나 찾으며 살겠다고 하며 모든 걸 내려놓고 버리고 떠남으로써 목숨을 부지했다.
그러나 심만삼의 얘기는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
심만삼 이야기의 역사적 배경은 진실이지만 그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허구라고 한다.
우선 그는 원나라와 명나라초기까지는 이름이 나지 않았고 그는 그저 돈많은 사람일 뿐이었다.
관료사회의 업적도 없고, 문인아사도 아니다. 명나라가 건립될 때, 그는 일찌감치 죽었고 그의 명성은 오히려 사후에 폭발적이 된 것이란다.
그렇기에 원나라의 부자였던 심만삼이 남경성건설이라는 공사에 참가할 수 없었고 더구나 주원장과 '절반을 나눠서 쌓거나' 혼자서 1/3의 공사를 도급받아 완공할 수는 없었다는 것...
다만 남경성의 건축을 심만삼과 연결시킨 것은 사실 주원장이 강소절강지역의 부자들을 대거 이주시켜 '도성을 충실하게 한 것'을 관련지은 것이며, 주원장이 아직 명 황제를 칭하기 전에 오왕으로 있을 때 소주의 부호들을 강제로 호주(濠州)로 이주시켰고, 명나라를 건립하고 홍무3년에 소주, 항주, 가주, 호주(湖州)등지의 4천여명의 부호를 집단으로 호주로 이주시키며 홍무13년에는 더욱 기세가 커서 소주절강지역이 4만5천의 부호가 주원장에 의하여 강제로 남경으로 이주당한다. 그 명목은 '수도를 번영시키는데 공헌한다'는 것이다.
대량의 부호들은 강제로 고향에서 뿌리가 뽑히는 동시에, 남경성의 건설도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부자들은 남경성으로 대량의 재물을 가지고 온다. 그리고 '열정적으로 수도건설을 지원한다' 많은 명나라의 야사, 필기는 남경성의 여러 건축들 철교, 주루, 수관등등을 모두 심만삼이 돈을 내서 만든 것이라고 하는데, 바로 여기서 연유한다.
허구적인 전설 속에는 부호인 심만삼이 주원장에 의하여 운남으로 유배간 것이라고 한다. 진실한 역사속에서는 많은 강소절강의 부호들이 천리먼길을 떠나서, 가족을 이끌고 가축들처럼 변방으로 쫓겨났다. 심만삼의 이야기는 가짜이지만 진실도 숨어 있다.
심만삼의 전설에는 명나라사람들의 주원장에 대한 불만섞인 정서가 드러난다. 이런 불만의 연유는 주원장이 강소절강의 부자들에게 대거 몰수 내지 탄압하는 정책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심만삼 전설에는 심만삼의 집안이 가산몰수당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혹은 중과세를 견디다 못해서 파산하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들 이야기가 나온 것은 당시 강소절강의 부자들의 비참한 운명과 관련이 있다.
강제이주, 중과세는 주원장이 부자들을 탄압하는 상용수단이었다. 죄명을 붙여서 '무슨 당'으로 몰아버리는 것은 비상수단이지만, 탄압의 효과는 훨씬 크다. 홍무13년, 호유용사건이 발발하자, 3만여명이 죽는다. 강소절강의 부자들이 많이 연루되었다. 심만삼의 사위이며 부에 있어서 심씨집안에 뒤지지 않던 육중화도 불행히 '호당'의 무리가 되어, 온 집안이 깡그리 죽임을 당한다. 홍무18년의 곽환 사건, 26년의 남옥 모반사건에서도 온 천지에 목이 달아난 사람들로 가득했다. 많은 강소절강의 부자들은 어느 날 눈을 떠보니 '남당'의 무리가 되어 있었다.
주원장은 부자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지 못했던 인물이다. 한편으로는 어려서의 경력때문일 것이다. 거지짓을 하고, 중으로 지내기도 했다. 그러면서 부자들로부터 백안시당했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 본인의 명나라제국에 대한 전체설계와도 관련이 있다. 소농출신인 그는 자신의 제국이 절대다수를 소농이 차지하도록 하기를 원했다; 유민이었던 적이 있던 그는 유민의 위력을 잘 알았다. 그들은 방대한 원제국도 무너뜨렸다. 자연히 그가 원하는 사회는 정태(靜態) 사회였다. 이 설계도면에, 부자들이 차지할 위치는 없었다. 부자들은 지주이고,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소농사회를 파괴하려는 욕망을 지닌 자들이었다. 소농들이 토지를 잃고 유민이 되면, 정태사회가 파괴된다. 부자들은 상인이 되고, 상업의 유동성은 정태사회에 위협적이다. 농민이 아니고 상인이 아니더라도, 그저 권력에 의존하여 치부를 한 자들도 주원장이 용납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자신의 통치에 위해를 가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재부는 주원장이 보기에 원죄가 있는 것이다.
어떤 시대이든, 발언권은 지식인들이 장악한다. 농업사회의 지식인은 대부분 출신가정이 비교적 좋은 곳이다. 부자계층이 비교적 많다. 그래서, 심만삼과 주원장간의 전설적인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널리 유행했다. 이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심만삼이라는 몸을 빌려서 이런 이야기를 만든 것은 비록 심만삼 본인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전체 주원장시대에 강남부자들의 집단적으로 당한 이야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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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사업하는 사람은 정치와 권력에 너무 가까이 해서는 안된다.
물론 자기 노력과 상관없이 사업이 번창하고 수익도 커지고 조직이 바대해지면
어쩔 수없이 이름이 나고 사회/정치/경제적 측면에서 간섭하고 참여하려는 이들도 많아지고
그 만큼 구설수에 오르 내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과유불급, 불가근 불가원(不可近不可遠) .......의 원칙을 잘 지켜나가며
윤리(투명성), 환경경영, 사회적 책임, 겸손과 모든 이해관계자에 대한 배려가 이루어지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행복을 가져다 주는 사람, 불행을 가져다 주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행복이 되기도 하고, 불행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사이가 좋다’는 것은 서로가 빈틈 없이 딱 붙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너무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닌
적절한 거리 즉 간(間)을 유지한다는 의미이다.
우주의 별들도 붙어 있는 별은 아무리 찾아 보아도 없다.
산(山)이 아무리 장대하고 아름다워도 거리를 두고 보아야 제대로 보이는 법
사랑도 마찬가지
경이원지(敬而遠之)란 말도 있다
"상대방을 공경하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라"는 의미이다.
즉 백성들이 원하는 정치를 하고, 백성들이 믿는 귀신을 공경하되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 진정한 지혜로운 지도자의 모습이라고 했다. 지혜로운 지도자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교훈이 아닐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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