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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와 아이젠하워의 리더쉽 : 두 전쟁영웅의 엇갈린 운명

SaintShin 2023. 9. 14. 12:34

같은 시대를 살며 제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을 동시에 겪으며 서로 다른 리더쉽으로 승승장구하기도 하고 최진하기도 했던 두 전쟁영웅

 

맥아더, 신뢰와 카리스마로 이끄는 러더쉽
아이젠하워,  소통과 화합을 바탕으로 한 포용의 리더쉽

 

과연 누가 더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까 ?사람은 죽는 순간에 스스로 만족감을 느끼는 삶이 성공아닐까 ?

두 리더쉽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더 필요하기도 하고 더 빛나기도 하나,
결국 최후엔 포용의 리더쉽이 더 많은 이들로부터 지지받고 오래가는 대기만성형 리더쉽.

 

맥아더장군

 

더글러스 맥아더는 1880년 1월 26일 아칸소 주 리틀록의 병영에서 미군 장군 아서 맥아더 주니어와 메리 핑크니 하디 맥아더(별칭은 "핑키")의 아들로 태어났다.  맥아더는 1893년 9월 그의 아버지가 텍사스 주 샌 안토니오에 배속되었을 때 그 지역 명문 사립학교인 서부 텍사스 군사 중학교(the West Texas Military Academy) "학식과 몸가짐 우수자"로 선정되어 골드 메달을 수여받았으며 학교 테니스 클럽에 참가하였고 학교 미식축구 팀에서 쿼터백을 수행했으며 야구 팀에서는 유격수를 수행했다. 그는 최종 년도에 100점 만점에 평균 97.33점에 달하는 우수한 성적을 거두며 졸업했다. 어머니 핑키 맥아더가 인맥을 동원해 테오발트 오트옌(Teobald Otjen) 하원 의원과 접촉하면서 테오발트 의원의 추천을 받고 미 육군 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에 진학할 기회를 얻어냈다. 다만 테오발트 의원은 자신의 추천을 희망하는 이들이 너무 많아서 시험을 통해 최종 추천자를 선정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맥아더는 어머니가 섭외한 밀워키 고등학교 교장 게르트루드 헐(Gertrude Hull)의 지도를 받으며 시험을 준비했고, 그 결과 100점 만점에 93.3점을 받아 시험에 합격하면서 테오발트 의원의 추천서를 받고 결국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할 수 있었다. 1903년 6월 11일, 맥아더는 93명의 졸업생 중 가장 높은 졸업성적인 2470점 만점에 2424.12점을 기록하며 여단장생도 겸 수석졸업 생도로 졸업한 소위 모범 우수학생이었다. 

 

1903년 10월, 맥아더는 필리핀으로 파병되는 제3공병대대에 부임했다가 1904년 10월,  말라리아와 도비 가려움증에 걸려 병원에 옮겨져 치료를 받고 퇴원한 후,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 캘리포니아 여단에 배속되었다가 1905년 7월에 태평양 지부의 수석 기술자가 되었다.
1905년 10월, 맥아더는 그의 아버지의 보좌관으로서 도쿄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후 그는 아버지와 함께 일본 군사 기지가 있는 나가사키, 고베, 교토를 방문한 후 홍콩, 자바, 싱가포르를 거쳐 1906년 1월 캘커타에 도착한 뒤 인도에서 마드라스 투투쿠디, 퀘타, 카라치, 노스웨스트 프론티어, 그리고 카이바르 고개를 차례로 순회했다. 그해 9월, 맥아더는 워싱턴 병영에서 제2공병대대에 전속하여 미 육군 공병학교 입교 명령을 받았다. 그는 그곳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백악관을 돕는 보좌관"도 역임했다.

 

1차 세계대전은 맥아더가 촉망받는 군인으로 두각을 보이며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유럽에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나서도 미국은 3년 이상 직접 전쟁에 참전하지 않으며 중립을 지키다가 1917년 4월 6일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하며 미국도 유럽에 병력을 파견하기 시작했고 맥아더도 자진 참전했다.

 

맥아더는 42사단을 이끌고 제168보병사단과 함께 Salient  du Feys의 독일군 참호에 3차례 공격을 감행했다. 이때 그는 사단 참모였음에도 불구하고 후방 진지에서 책상에 편히 앉아 서류나 끄적이는 걸 혐오하고 전투 현장으로 가서 부하들을 지휘하기 일쑤였다. 그는 전투 시 헬멧도 쓰지 않고 가벼운 전투모만 착용한 채 전방에서 권총으로 적을 향해 쏘며 부하들에게 "전진! 전진!"을 외쳐댔다.

심지어 그는 독가스 마스크도 착용하길 거부하고 맨얼굴로 부대를 지휘하다가 2차례 가스 공격을 받고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쇼'가 그의 부하들에게 감동을 줄 거라며 이같은 기행을 전쟁 끝까지 지속했다. 미군 국방부는 이러한 그의 무공을 기리기 위해 수훈 십자장을 수여했다.

 

1918년 6월 26일, 맥아더는 38세의 나이에 준장으로 승진했다

1919년, 맥아더 준장은 39세로 최연소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장으로 부임했다. 
1922년 10월, 맥아더는 웨스트포인트를 떠나 마닐라 군대 지휘권을 맡기 위해 필리핀으로 갔다가 1923년 2월과 3월에 심장병으로 고통받는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워싱턴으로 돌아갔다.

1930년, 맥아더는 50세에 미 육군 대장으로 진급했다. 이는 미 육군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에 대장이 된 사례였다. 이후 맥아더는 1930년 9월 19일 필리핀을 떠나 샌 프란시스코와 9군단 지역 지휘부를 이끌었고 11월 21일 미 육군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이렇듯 승승장구하는 군 경력을 보내고 있던 그는 무한한 자부심에 빠져들었다. 그는 남들과 대화할 때도 스스로를 '맥아더'라고 불렀고 자신의 이미지를 미국 대중들에게 홍보하기 위해 홍보 직원들을 고용했다. 맥아더는 공산주의를 혐오했고 그들이 미국을 좀먹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강건한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이러한 그의 사고관은 뒤에 있을 대형사고를 초래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1932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민주당 후보는 허버트 후버를 꺾고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루스벨트와 맥아더는 처음엔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그들은 1차 세계대전 이전에 함께 일한 바 있었고 정치적 견해 차에도 불구하고 친구로 지냈다. 맥아더는 민간인 유지 군단을 운영함으로서 뉴딜 정책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국방 예산을 줄이려는 루스벨트의 정책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육군 예산의 51%를 삭감하겠다는 루스벨트의 제안에, 맥아더는 분노의 일갈을 날렸다.

 

1935년, 필리핀 자치령 대통령 마누엘 케손은 자신의 친구인 맥아더가 필리핀 군대의 창설을 감독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맥아더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승인을 받고 필리핀 연방 정부의 군사 고문 겸 원수에 취임하여 아이젠하워와 함께 필리핀으로 향했다. 

 

1937년 12월 31일, 맥아더는 공식적으로 육군에서 퇴역했다. 그는 미국 정부의 군사 고문으로 대표하는 것을 중단했으나 민간 차원에서 케손의 고문으로 남았다. 그렇게 그는 필리핀 육군 원수로서 군 장군 경력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듯했다. 그러나 1941년 루즈벨트대통령의 권유로 복귀하였다. 

 

일본과 미국 간의 전운이 감돌고 있던 1941년 7월 26일 루스벨트 필리핀군을 연방군으로 조직하고 퇴역 장군인 맥아더를 동원소집하여 극동군 미 육군 사령관으로 지명했다. 맥아더는 7월 27일 중장으로 승진했고 12월 20일에 대장으로 승진했다. 1941년 7월 31일 필리핀 방면군은 2만 2천명을 배정받았는데 그 중 1만 2천명은 필리핀 척후병으로 조나단 M. 웨인라이트 소장의 지휘를 받았다.

 

1945년 이후, 세계를 상대로 싸우며 태평양에서 추축국을 좌절시킨 그는 일본에 “정복자”로 주둔하면서 천황과 나란히 서서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사진을 찍은 것은 대대적으로 홍보하면서 일본인으로부터 천황과 동등한 지위의  “미국인 시이저(American Caesar)”라는 별명을 얻었다.

 

  기본적으로 맥아더는 강단이 있고, 비타협적이며, 상대방과 기(氣) 싸움을 즐기는 경향이 있었다. 대공황 시기에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맥아더는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1882~1945) 대통령과 군 예산 삭감 문제를 놓고 줄다리기를 하다가 이견이 좁혀지지 않자 “다음 번 전쟁에서 적의 대검에 배를 관통당해 쓰러져 적병에게 목을 밟힌 채 진흙 속에서 죽어가는 병사가 마지막으로 내뱉는 저주의 이름이 ‘맥아더’여야지, ‘루즈벨트’가 되지 않기를 빕니다”라고 폭언을 해 사임 직전까지 간 적이 있었고, 2차 세계대전 중 미 해군의 윌리엄 할시(William F. Halsey, 1882~1959) 제독은 맥아더와 의견차가 발생하게 되면 그는 상대방이 지칠 때까지 논의를 반복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술회했다. 

 

6.25 전쟁 중 맥아더 장군은 트루먼 대통령과도 지속적으로 충돌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내내 엄청난 전비를 지출했으므로 트루먼 행정부는 종전과 함께 국방예산을 대규모로 삭감했고, 맥아더 휘하의 미 극동사령부(US Far East Command, FECOM) 병력 또한 1947년까지 30만 명을 헤아리던 것이 불과 한 해 뒤인 1948년엔 142,000명으로 감군했다. 맥아더는 급격한 병력 감축에 지속적으로 항의했지만 트루먼은 상관하지 않고 계속 감군하여 6.25 전쟁이 발발하던 1950년 6월경 극동사령부에는 10만 8천 명 밖에 남지 않았고, 그나마도 대다수가 신병들이었다. 이 때문에 극동사령부는 2차대전 중 태평양 전역에서 버려졌던 전쟁물자를 대대적으로 회수하여 썼을 정도였다. 맥아더와 트루먼은 6.25 전쟁 중인 1950년 10월 15일 웨이크(Wake) 섬에서 회견했으나, 그다지 건설적인 이야기는 전혀 오간 것이 없었다. 맥아더는 이 자리에서 중국의 개입 가능성이 극히 낮다고 보고했고, 심지어 전쟁을 “올해 안”에 모두 종결 짓겠다는 호언 장담까지 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중국이 본격 개입하면서 전쟁이 장기화되자 트루먼은 전쟁 목표를 “시작한 곳에서 끝나는 것”으로 설정했으나, 맥아더는 근원이 뿌리 뽑힐 때까지 확전해야 한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맥아더가 행정부 방침을 거스르는 것을 계속 두고 볼 수 없던 트루먼은 1951년 미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더 이상의 확전을 원치 않았기에 1951년 4월 11일 오전 맥아더 원수를 UN 사령관에서 해임하고 말았다. 맥아더가 떠난 이후 6.25 전쟁의 결착은 2차 세계대전 중 또 다른 전쟁영웅이자 일곱 명의 원수 중 한 명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1890~1969) 대통령이 지었다. 어떻게 보자면 6.25 전쟁의 시작과 마무리가 모두 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두 미군 원수의 손을 거쳤던 셈이다.

 

  맥아더와 아이젠하워의 인연은 복잡하면서도 흥미롭다.

 

드와이트 데이비드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1890. 10. 14 ~ 1969. 3. 28)는 미국의 군인이자 제34대 대통령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의 최고위급 장성[1]으로, 서부전선에서 횃불 작전노르망디 상륙작전시칠리아 침공을 주도하였다.  그는 맥아더보다 10살 어리며 전반적으로 진급이 매우 늦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두 사람의 첫 인연은 맥아더 장군(당시 소장)이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하던 193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맥아더 총장은 1차세계대전 참전용사들이 주축이 된 “보너스 군대(Bonus Army)”가 참전수당의 조기지급을 요구하며 워싱턴 D.C. 인근에서 시위를 하자 “지체없이 시위지역을 포위하여 정리하라”는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 1874~1964) 대통령의 명령을 받고 시위대를 강경 진압했다. 1933년 2월부터 육군참모총장 수석 군사보좌관으로 보직된 아이젠하워 소령은 시위대에 대한 강경진압에 반대했으나, 정작 시위대 진압이 끝난 뒤 스스로 작성해 올린 공식 보고서에는 맥아더의 선택을 합리화함으로써 그를 지원했다. 이것이 두 사람의 인연이 되었다.

 

맥아더가 총장 퇴임 후 1935년 마누엘 퀘존(Manuel Quezon, 1878~1944) 대통령의 요청으로 필리핀 군 고문관으로 초청받자 맥아더는 아이젠하워를 부 고문관으로 임명했다. 당시 필리핀은 1946년을 목표로 독립을 준비 중이었고, 미 정부는 타이딩스-맥더피(Tydings-McDuffie) 법에 따라 필리핀 독립을 지원 중이었으므로 맥아더에게 미래 필리핀 군을 설계해달라는 요청을 한 것이다. 아이젠하워는 소령으로서 16년의 세월 후, 아이젠하워는 1936년 중령으로 진급되었다.

 

두 사람은 1935년 10월 26일자로 필리핀에 도착했으며, 곧 ‘독립국가‘ 필리핀의 국방계획을 수립에 착수했으나 이 때까지 순탄했던 두 사람의 관계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필리핀 군의 미래에 대한 두 사람의 구상이 달랐고, 또 리더십의 스타일도 크게 달랐다. 1936년 8월, 퀘존 대통령이 맥아더에게 필리핀 군 원수 계급을 부여하겠다고 했을 때도 아이젠하워는 이를 거절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해 맥아더를 설득하려 했으나 맥아더는 이를 수락했고, 이것이 사실 처음부터 맥아더의 계획이었지 퀘존의 계획이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야 알았다.

 

  기본적으로 아이젠하워는 필요할 때 직언을 하는 타입이었지만, 맥아더는 자신의 판단력과 리더십에 자신이 있었으므로 참모진에 예스맨을 선호했다. 훗날 아이젠하워는 맥아더와 함께한 2년을 그다지 좋게 기억하지 않았으며, “우리는 내내 개인적인 야망, 영광, 이기주의로 야기된 모든 문제들로 충돌했다”고 술회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1938년, 맥아더가 필리핀 국민들에게 군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할 요량으로 대규모 퍼레이드를 조직한 사건으로 인해 파국을 맞았다. 퀘존 대통령이 자신과 상의 없이 퍼레이드를 조직한 것에 대해 크게 항의하자 맥아더는 자신이 내린 지시에 따라 열정적으로 퍼레이드 준비를 했을 뿐인 아이젠하워에게 책임을 돌렸다. 맥아더는 참모들을 전부 불러 놓은 앞에서 ‘실제 퍼레이드를 준비하라는 뜻이 아니라, 해도 좋을지의 여부만 조용히 알아보라고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젠하워는 이에 폭발해버렸다. “장군님, 지금 결국 제가 거짓말쟁이라고 하고 계십니다만, 전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를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전 그만 본토로 돌아가겠습니다.” 이에 맥아더는 아이젠하워를 따로 불러 “자네의 네덜란드계 조상의 성질이 튀어나오는 걸 보니 흥미롭구만. 다 오해에서 야기된 일 같으니 이 정도로 잊어버리세.”라고 다독였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았고, 아이젠하워는 리처드 서덜랜드(Richard K. Sutherland, 1893~1966) 소령(중장 예편)과 교대한 후 본토로 돌아가버렸다.

 

  이후 두 사람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길로 갈라져 갔다. 본토로 돌아간 아이젠하워는 월터 크루거(Walter Krueger, 1881~1967) 장군 휘하에서 미 제 3군 참모장을 지냈으며, 1941년 3월에 대령으로 진급한 뒤 육군부 전쟁기획국(개전 후 작전처로 개명) 국장에 보직됐고, 조지 마셜(George C. Marshall, 1880~1959) 육군참모총장의 눈에 띄면서 승승장구했다.

 

2차세계대전 발발 시 직접적인 참전을 꺼리던 미국이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미군이 2차세계대전에 본격적으로 참전하면서 아이젠하워는 유럽, 맥아더는 아시아권에서 활약했으므로 두 사람은 1939년 이후 단 한 번도 마주칠 일이 없었다. 종전 후 일본에 진주하여 군정사령관이 된 맥아더와 마셜의 후임으로 육군참모총장이 된 아이젠하워는 도쿄에서 단 한차례 만났으나 그걸로 끝이었고, 다시 아이젠하워는 연합 원정군 최고사령부(SHAEF: Supreme Headquarters Allied Expeditionary Force) 사령관이 되어 프랑스로 떠났고, 곧이어 6.25 전쟁이 터졌을 땐 맥아더가 UN 사령관이 되어 신생 대한민국의 방어와 UN군의 역습을 지휘했다.

 

아이젠하워는 2차 세계대전 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총지휘하면서 직접 실행을 보지 않았어도 당대 이름 떨쳤던 조지 패튼이나 몽고메리 장군, 오마 브래들리 , 심지어 처칠, 몽고메리 육군 원수와 샤를 드 골 장군 같은 전쟁영웅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설득하고 교묘하게 조율하며 인내와 포용력의 리더쉽을 보이며 존경을 받았다. 

 

그러던 중 1951년 4월 12일에 맥아더가 UN 사령관에서 해임되자 AP(Associated Press)의 딕 오말리(Dick O’Malley, ~1999) 기자는 독일 코블렌츠(Coblenz)에서 프랑스 장성들과 회담 후 나오던 아이젠하워에게 맥아더 해임소식을 들었는지 물었는데, 이 소식을 전혀 모르던 아이젠하워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도 못했는데(I’ll be darned)”라 답했다.

   

불과 1년 뒤인 1952년 11월 29일 아이젠하워는 대통령 (공화당 소속) 당선자 후, 대통령 후보시절 한국에 직접 방문하여 전쟁을 끝내겠다는 공약 이행을 위해 한국에 방문했으며, 중국측이 휴전에 동의하도록 강요할 목적으로 핵무기 사용도 불사할 용의가 있음을 강조했다. 중국은 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을 지휘한 아이젠하워의 명성에 주눅들었고, 무엇보다 전쟁을 마무리 짓고 싶었던 차에 1953년 소련의 스탈린(Joseph V. Stalin, 1878~1953)서기장마저 죽었으므로 휴전이 전격적으로 성사됐다. 휴전이 성사되자마자 아이젠하워는 글로리 작전(Operation Glory)과 빅 스위치 작전(Operation Big Switch)을 실시하여 전사자 유해와 포로를 공산진영과 교환하면서 전쟁을 마무리 짓겠다는 공약을 완수했다.

 

  사실 맥아더와 아이젠하워의 악연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였으므로 당대에도 두 사람 사이가 좋지 못할 것이라는 추측이 난무했고, 실제로도 두 사람은 필리핀 근무 이후 관계가 소원해졌다. 부처 같은 인품의 아이젠하워조차도 필리핀을 떠나던 당시 맥아더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담은 언급을 한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하지만 그는 훗날 맥아더 휘하에서 근무했던 경험을 언급하면서 이 기간을 통해 “전쟁 때 부여받은 막대한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고 말했다.

 

아이젠하워는 대통령에서 퇴임한 후인 1967년경, 맥아더와의 관계를 묻는 질문을 받자 이렇게 답변했다. “우리 두 사람의 ‘적대관계’는 사실 과장된 측면이 많다. … 두 사내가 7년씩이나 함께 일했다면 강한 유대감이 있어서 그랬던 것 아니겠는가?”

 

  1960년 1월 26일, 맥아더의 80회 생일날 노년의 아이젠하워는 ‘함께 늙은’ 그의 옛 상관에게 생일 축전을 보냈다. “우리 조국을 위해 헌신해 온 장군님의 노고에 대한 우리 모두의 감사한 마음이 오늘 새삼 새로워지는 느낌입니다.” 그 얼마 뒤 뉴욕시내 왈도프 아스토리아(Waldof Astoria) 호텔에 거주하던 맥아더는 워싱턴 D.C.에 거주 중이던 아이젠하워를 일부러 찾아가 두 사람은 인생 마지막으로 해후했다.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이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일부러 찾아간 정황으로 볼 때 둘은 마지막으로 만나 그간의 모든 앙금을 털어내지 않았을까 추측될 뿐이다. 맥아더는 4년 뒤인 1964년 4월 5일에 타계했고, 아이젠하워는 그로부터 다시 5년 뒤인 1969년 3월 28일에 눈을 감았다.

 

  성격과 리더십 스타일이 크게 다른 두 사람은 마찰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소 독단적이지만 항상 자신감에 차 있고 훌륭한 쇼맨십을 갖춘 맥아더의 스타일은 조용하면서 포용적이며 상대방과 타협을 통해 합의점을 찾아가는 스타일인 아이젠하워와 큰 차이가 있었다. 두 사람이 정확히 어떤 관계였는지는 이들 둘 밖에 모를 일이다. 하지만 누구나 살아가면서 한 두 번 이상은 경험하듯 한 번 틀어진 관계는 회복하기가 무척 어렵고, 그 후 용서와 화해의 손길을 먼저 내미는 것 역시 큰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마지막 순간 화해가 가능했던 것은 서로의 진심과 사심 없는 마음 가짐을 내내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 참조) 미국의 역대 대통령 히스토리

 

조지 워싱턴 · 존 애덤스 · 토머스 제퍼슨 · 제임스 매디슨 · 제임스 먼로 · 존 퀸시 애덤스 · 앤드루 잭슨 · 마틴 밴 뷰런 · 윌리엄 헨리 해리슨 · 존 타일러 · 제임스 K. 포크 · 재커리 테일러 · 밀러드 필모어 · 프랭클린 피어스 · 제임스 뷰캐넌 · 에이브러햄 링컨 · 앤드루 존슨 · 율리시스 S. 그랜트 · 러더퍼드 B. 헤이스 · 제임스 A. 가필드 · 체스터 A. 아서 · 그로버 클리블랜드 · 벤저민 해리슨 · 그로버 클리블랜드 · 윌리엄 매킨리 · 시어도어 루스벨트 ·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 우드로 윌슨 · 워런 G. 하딩 · 캘빈 쿨리지 · 허버트 후버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해리 S. 트루먼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존 F. 케네디 · 린든 B. 존슨 · 리처드 닉슨 · 제럴드 포드 · 지미 카터 · 로널드 레이건 · 조지 H. W. 부시 · 빌 클린턴 · 조지 W. 부시 · 버락 오바마 · 도널드 트럼프 · 조 바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