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대한민국 정부와 국회의원 등 고위행정가나 정치인들이 이토록 편협한걸까 ?
너무 자기 중심적이고 일방적이며 자만과 교만이 가득하여 자기 생각만 옳고 남은 틀리다는 식의 정치와 행정을 계속해 나간다. 그리곤 그에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사람들에게는 잘못 알거나 괴담에 속는 사람으로 치부하고 몰아 세운다.
야당이 여당이 되거나 여당이 야당이 되어도 자리만 바뀔 뿐, 똑 같은 행태가 반족되는 한국 정치가 한심하고 원망스럽다.
최근 국방부와 육사가 육사에 설치되어 있는 영웅 5인중 홍범도 장군 (1868~1943)의 흉상 철거와 백선엽 장군 흉상 대체 설치 관련하여 논란이 많다.
25일 국회 국방위원회에 출석한 이종섭 국방부 장관은 해당 흉상을 철거하는 이유에 대해 "공산주의, 공산당 가입했던 사람이 있다. 소련공산당에 가입했던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봉오동 전투의 홍범도 장군이 소련 공산당에 가입한 이력을 콕 짚어 언급하며 "북한을 대상으로 전쟁 억제를 하고 전시에 이기기 위해 필요한 인력을 양성하는 곳에서 공산주의 경력이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느냐는 문제가 제기됐다"며 홍범도 장군을 평가했다.
강선우 민주당 대변인은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돼 있다. 국방부도 국군의 뿌리가 독립군과 광복군으로 분명히 밝혔다"며 "그런데도 독립영웅들의 흉상을 굳이 철거하는 것은 국군의 정통성과 독립 투쟁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으로 반헌법적인 처사"라고 비난했다.
28일 국방부대변인은 이에 대한 해명 기자회견을 하다가 여러 기자들에게 "이렇게 어설프게 역사적 식견도 없이.."등 호된 지적을 받기도 했다.
국방부는 홍 장군이 △소련공산당 중심 독립군 통합을 지지했고 △자유시 참변 재판위원으로 참가했으며 △이후 소련 적군 대대장으로 임명된 사실을 근거로 내세웠다. 그러면서 1921년 6월 발생한 자유시 참변(독립군이 무장해제 요구에 불응해 소련군과 벌인 교전)과 연관돼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심지어 기자들의 지적이나 질문에 대변인은 줄곧 즉답이나 확답보다는 입장문에 있는 걸 보면 된다거나 확인해봐야 한다는 둥 두리뭉실 어물쩍 넘어가는 행태를 보며 이런 대변인이 왜 필요한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정부.여당이나 국방부에선 잘했다고 칭천할런지는 모으겠으나.....
국방부에선 홍범도 장군이 빨치산으로 활동했다고 기자들에게 배포한 입장문에 기재했는데 몇몇 기자는 "빨치산은 Partisan (비정규 게릴라)라는 것에서 유래한 말로 그 당시 국가나 정규군이 없었던 상황에서 독립군은 모두 비정규군 빨치산"이며, 그 것도 김일성은 1912년에 태어난 사람으로 홍장군이 활동한 1919~1922년 빨치산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며 심지어 레닌의 공산당과 스탈린의 공산당을 혼합해서 말하면 안된다고까지 국방부 대변인을 훈계했다.
또한 2차세계대전과 일본 주도의 태평양전쟁 당시, 침략국 독일, 이태리, 일본을 저지하기 위해 미국과 소련이 연합한 시기로 일제강점기에 연해주를 무대로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은 민족주의자들도 있고 또 공산주의/사회주의와 연계한 것은 일련의 시대적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는 한국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이 공산당과는 엄연히 다르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해명이다.
홍범도 장군이 소련 공산당에 입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것은 조선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같이 싸웠던 사람들을 먹여살리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결코 공산주의활동을 하지도 않았고 조선독립투사들을 학살한 자유시참변활동도 하지 않았다. 홍 장군은 1943년 서거했다. 북한 정권 수립과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또 혹자는 홍장군이 레닌을 만나고 권총을 받고 공산주의에 동조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 양식있는 역사가들은 레닌(1870~1924)이 1917년 볼세비키혁명에 성공하고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며 당시 오히려 자본주의제국들이 식민지를 개척/유지하며 착취하고 있던 것에 대해 반발하여 식민지를 해방하고 사회주의를 형셩해야 한다고 하며 그런 식민지를 돕겠다고 나서며 당시 일본군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던 조선독립군에게 무기와 군량미, 지원금을 제공하며 식민지 독립을 돕겠다는 러시아에 햡조하는 것은 뭐가 문제냐며 제발 역사를 좀더 잘 공부하고 정신 좀 차리라고 입이 터지라 외치고 있다.
심지어 미국조차도 2차 세계대전때 1945년 얄타회담에서 루즈벨트, 처칠, 스탈린이 만났고, 같은 해 포츠담회담에선 트루먼, 애틀리, 스탈린이 만나 동맹하여 일본 패망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냈는데 이렇게 보면 "미국 조차도 소련과 손잡았으니 공산주의라고 말할 수 있겠냐"며 역사가들은 목소리 높여 홈범도장군이 공산당 활동을 했다고 하는 정부, 여당의원들과 일부 몰지각한 학자들을 탓하고 있다.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이사장인 더불어민주당 우원식 의원이, 독립운동가 흉상 철거를 추진하는 이종섭 국방부 장관 파면을 촉구했습니다. 우 의원은 "국방부는 홍범도 장군이 1919∼1922년 빨치산으로서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를 한 게 문제라고 한다"고 말하고, 1912년에 태어난 김일성의 당시 연령을 상기시키며 "그때 북한 김일성 나이가 몇 살인데 홍범도·김좌진 장군을 중심으로 독립군이 일본군과 맞선 것을 김일성식 빨치산과 연계시키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면서 "혼신의 힘을 다해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을 김일성식 빨치산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무식한 국방부의 무도한 작태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또 홍범도 장군이 1927년 소련공산당에 가입해 문제가 된다는 국방부 입장에 대해서는 "지금의 시점에서 이념적으로 매도하는 역사 쿠데타"라면서 "홍 장군이 1922년 소련 땅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할 때 쓴 입국 서류를 보면 '직업은 의병, 목적은 고려 독립'이라고 썼다"고 반박했습니다.
또 혹자는 북한 정권과 일제강점기 공산주의자들을 동일시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홍범도를 ‘친북한파’로 인식하는 것도 사실에서 어긋나며. 그는 해방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평생 홍 장군 생애를 연구해 온 반병률 한국외대 명예교수는 국방부 주장에 대해 다음의 것들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했다
①자유시 참변 연루: "침소봉대… 사후 진상 규명 탄원서까지 제출"
"외형적으로 그럴듯하지만, 홍 장군은 러시아 적군의 독립군 진압 과정에 개입하지 않고 부대를 다 빼냈다"며 "홍 장군을 '가해자'라고 보는 건 침소봉대"라고 지적했다.
이어 "오히려 참변 6개월 후 전모를 파악한 홍 장군은 사건에 대한 진상을 밝히고 책임자를 처벌하라는 탄원서를 소련 정부, 러시아 공산당, 국제공산연맹 측에 제출한 사실이 있다"고 반박했다. 반 교수에 따르면, 탄원서 제출 시점은 1921년 12월이며 홍 장군 외에 최진동, 이청천, 이병채, 허근 등 대대장급 29명이 참여했다.
참변 당시 홍 장군이 자유시에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홍범도 평전을 쓴 이동순 영남대 명예교수는 "당시 홍 장군은 다른 일로 자유시에 없었고, 나중에야 비참한 일이 발생한 걸 알았다"며 "나중에 재판에 참여한 것도 실제로는 많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그렇게 뒷수습을 하고 자기 책임이라며 소처럼 울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덧붙였답니다.
②레닌에게 자유시 참변 보고: "자랑 아닌 비참한 상황 보고… 사실 왜곡"
국방부는 "홍 장군이 1922년 레닌으로부터 권총, 상금, 친필 서명된 '조선군대장' 증명서를 접수했고, 그가 1930년대 작성한 이력서에는 '자유시 사태 보고를 위해 한인 빨치산 대표 자격으로 레닌을 만나러 모스크바에 갔다'고 돼 있다"며 레닌 공산당과의 연루설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장세윤 동북아역사재단 명예연구위원은 "1922년 당시엔 레닌 러시아 혁명정부가 세계 약소 민족들에 굉장히 많은 지원을 할 때"라며 "표창은 빨치산으로서 공산당원 활동을 열심히 했기 때문이 아니라, 조선이 일본과 싸웠던 활동을 격려하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반 교수는 "자신의 공을 자랑하러 간 게 아니라 비극적 상황을 누군가는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보고하러 간 것"이라며 "국방부는 단편적 사실을 동원해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일침을 놓았다.
③봉오동·청산리 전투 빨치산으로 참가: "러시아 주둔 독립군 사령관 명시"
국방부는 홍 장군의 자유시 참변 이후 행적을 근거로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만주로 돌아간 김좌진, 이범석 장군 등과는 다른 길을 갔다"며 "특히 홍 장군이 1919~1922년 빨치산으로 활동한 것으로 기록돼 있어 봉오동전투 (1920년 6월) 7일)과 청산리 전투(1920년 10월ㅡ 일주일간에 걸쳐 서울면적 5배 달하는 청산리 여러 곳에서 여러 차례 교전이 벌어진 전투로 김좌진부대와 홍범도부대가 각각 하루에 거의 60-70km에 달하는 거리를 산악을 타고 다니며 굶어가며 초인적인 정신으로 싸워 일본군을 무찔렀다 )에도 빨치산으로 참가했다는 의혹이 있다"고 공산주의 이력을 부각했답니다.
* 참고) 봉오동과 청산리전투는 독립군 뿐만 아니라 독립군에게 탄환이 날라다니는 전장에서 주먹밥을 던져주던 아낙네들까지 간도지역 동포 30만명이 같이 싸운 전투이며, 오늘날 조선족이라 부르는 중국동포들이 당시 모든 독립운동 주역의 후손이라 볼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역사학계는 당시 '빨치산'은 공산당원과 아무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장 위원은 "빨치산은 러시아어 파르티잔(partizan·유격대)에서 나온 말로, 당시엔 항일부대(의병)라는 뜻으로 쓰였다"며 공산당과 관련이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홍 장군이 북간도 지방으로 들어오면서 발표한 '유고문'이라는 선언문을 보면 직책에 '노령 주둔 대한독립군 대장'이라고 썼다"면서 "이는 러시아에 있는 독립군 사령관을 의미하는데, 이것을 빨치산 활동으로 해석하는 건 큰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④공산주의자 육사에서 기리는 건 부적절: "색깔론 갇혀선 안 돼"
국방부는 "김일성이 소련공산당 사주를 받고 6·25전쟁을 자행한 사실을 고려할 때 공산주의 이력이 있는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육사에 설치해 기념하는 것은 정체성에 맞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홍 장군이 공산당원이 된 배경은 이념적 판단보다는 생계를 위한 것이므로 공산주의자로 내모는 건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이 교수는 "홍 장군은 일자무식의 포수 출신으로, 이념을 가질 사람이 못 된다"며 "노후에 생존을 위해 뭔지도 모르고 농사짓고, 연금 받으려고 가입한 것"이라고 평가했답니다.
'홍 장군이 공산당원이라는 이유로 육사에 걸맞지 않은 사람이냐'는 질문에도 대다수 역사학자들은 고개를 저었다. 정태헌 고려대 교수는 "사회주의 계열이 독립운동을 주도했기 때문에 색깔론에 기반한 접근법은 옳지 않다"면서 "북한뿐만 아니라 외침에 저항했던 역사를 육사 생도에게 가르치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반 교수는 "국방부의 논리라면 왕정을 추구했던 의병세력, 아나키스트였던 이회영, 김좌진 모두 제외하는 게 맞다"며 "굳이 독립운동을 빈약하게 만들 것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답게 다름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 독립군가가 담긴 영상..... 정말 익숙한 음의 멋지고 장업한 곡이다.
* 홍범도 장군의 생전 영상 최초 공개! [봉오동⦁청산리 승전 100년 민족영웅 홍범도] KBS 201024 방송
홍범도 장군의 실제 모습이 담긴 영상부터 봉오동 전투의 준비 과정과 승리로 이끈 전술!
그리고 두 아들과 아내를 잃은 슬픔 속에서도 오직 대한 독립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던 그의 인간적인 모습까지 봉오동·청산리 승전 100년 민족영웅 '홍범도'
* 반면에 육사가 홍범도 장군 흉상을 대체한다는 백선엽은 누구인가 ?
만주 펑톈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1941년부터 1945년 일제 패망 때까지 만주국군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협력했던 때이다.
특히 한인(韓人)으로 하여금 한인(韓人)을 통제하고 토벌하기 위해 간도특설대가 조직되어 항일무장세력 탄압에 앞장섰다. 간도특설대는 만주국의 '삼광정책'(三光政策: 모두 죽이고, 모두 불태우고, 모두 빼앗아가는 정책)을 충실히 수행한 악명 높은 부대였다. 이에 따라 백선엽은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된 바 있다.
백선엽 장군은 21살 때인 1941년 일제의 영향 아래 있던 만주국 군대인 만주군 소위로 임관했고, 1943~1945년 항일 무장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설립된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했다. 그는 회고록 ‘군과 나’ 일본어판에서 “주의주장이 다르다 해도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었다”며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그 때문에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밝힌 바 있다.
그러나 윤석열 정권의 국가보훈부(장관 박민식)는 지난 7월 칠곡 다부동에 백선엽의 거대한 동상을 세우더니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 백선엽의 안장자 정보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기록을 지웠다.
이에 반해 이화영은 전 재산을 바쳐 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고, 홍범도는 봉오동 전투의 영웅이고, 심좌진은 청산리 전투의 영웅, 이범석은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으로서 대한민국 국군의 창건에 크게 이바지한 인물로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과 함께 자랑스런 한국의 영우으로 육사에 흉상이 세워졌다.
역대 정권들은 보수와 진보에 상관없이 홍범도장군에 대해
박정희대통령은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노태우대통령은 카자흐스탄에 묻힌 홍장군의 유해봉환을 시도했으며, 박근혜대통령은 해군잠수함에 홍범도함이라 명명했고. 문재인대통령은 유해를 봉환하고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는 등 지금까지 좌파와 우파에 상관없이 홍장군의 행적을 문제삼은 적은 없었다.
그런데 윤석열정권에 들어와 갑자기 공산당 이력과 확인도 되지 않은 자유시참변활동 참여를 빌미로 홍장군 공을 덮으려 하니 향후 정권이 바뀐 후 자신과 현 집권당의 과를 어찌 감수하려 할지 걱정이다.
몇몇 역사학자나 사설가들은 오히려 1930~40년대 만주땅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소래 김중건과 그가 창설한 원종교, 발해학교/발해농장과 대종교의 활동, 또는 만주의 푸순지역에 만인갱 - 일제가 7만명 정도의 군인, 군무원, 조선독립군이나 민간인을 생매장한 곳 - 또는 그 위쪽의 731부대에 대해 연구하라는 등 오히려 거꾸로 해석하고 멋대로 재단하는 정부와 여당에 대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사실이 이럴진대 국회감사나 기자설명회에 나선 국회의원이나 정부 대변인들은 윤석열대통령이 "적극적으로 임하라"라는 지시에 싸움꾼으로 바뀌어 자기 말만 하고 떄론 약간의 욱박지름과 말돌리기로 관철하고 있으니 도대체 국가가 어찌 돌아갈 지 걱정스럽고 한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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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는 많은 침략과 전쟁, 심지어 일제강점기를 겪으며 전환의 시기를 겪어왔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한국전쟁을 겪으며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대한민국정부가 출현해서도 사상과 이념의 갈등을 겪어왔다.
이전의 글에서도 썻지만 현대에서는 절대 적도 절대 아군도 없다.
국가와 국민을 위태롭게 하고 해하려고 하는 세력이 우리가 적대시하고 방어해야 할 적이다.
즉 북한만이 적이 아니라 우리 주변국 누구라도 또는 테러단체나 마약조직 등 한국과 사회를 위태롭게 하거나 망가트리려는 모든 세력이 적이란 애기다. 즉 국방부장관의 말도 맞지만 너무 편협한 논리이다.
물론 현재의 한국은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국가이다.
그러기에 반자유, 반민주적 사상을 가지고 국가기반을 어지럽히는 경우는 반드시 방지해야 한다.
그러나 국가가 수립되기 이전에 지금의 국가를 지키고 세우기 위해 공을 세운 사람들은 그 공과 동시에 과를 함께 기억하고 기록하여 후대로 하여금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왜곡되지도 않으면서 명확하게 판단하게 하면 될 것이다.
위의 걍우, 홍범도 장군의 동상을 철거하지 말고 필요하다면 그 명판 기록상에 토를 달면 된다.
굳이 백선엽장군 동상을 세우려먄 그 옆에 세우고 역시 공과 과를 병기하여 공을 기리고 과에 대해선 교훈을 주도록 하면 될 일이다.
사람은 완벽할 수 없다. 누구나 항상 희생과 자기 안전 사이에서 갈등을 하게된다. 그럼에도 어느 시기에 국민을 위해 희생한 것이 있다면 그 것을 기리고 발못한 것이 있디면 그에 대해선 비판하면 된다.
제발 이념적인 걸로 싸우지 마라.
국민세금 아깝다.
그럴려면 감투를 벗어라
그런데 이틀전 윤석열대통령은 당정 연찬회의에서 무엇보다 이념이 중요하다고 연설했다.. 나참 ~!
일면 이해되는 구석도 있지만 매사 그걸 기준으로 삼으면 남는 건 아군과 적군 논리 밖에 없다.
옳고 그름은 면밀히 따지되 때론 반대에도 귀기울이고 포용하고 설득하고 떄론 그 반대 의견을 수용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근본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대한민국은 국민들이 동학혁명, 4.19혁명, 6.29선언, 광주민주화운동 등등 그런 근본에서 절대적인 부패권력이자 자기 중심 정권에 맞서서 싸우며 일으키고 지켜온 나라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지금까지 묵묵히 일해 온 산업계/학계/연구기관 민초들과 부지런하고 정직한 공무원들과 군인들이 어렵게 일궈온 경제력과 국방력을 잃을 수 있는 풍전등화 위기에 있다.....
작금의 정치권은 마치 1400년대 임진왜란을 불러 일으킨 사색당파 싸움시기와 흡사하다. 비록 상대가 옳은 소리를 해도 그냥 상대가 싫어서 반대하고 비판하고 싸움을 거는 바보 천치들의 합창 같아 귀가 아프고 머리가 어지럽다 ....
제발 정신들 차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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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자유시 참변’ 주도? 학계 “무장해제·진압 간여 안했다”
국방부는 육군사관학교 안에 있는 홍범도 흉상을 이전하겠다며 ‘자유시 참변’ 사건을 주된 이유로 들었다. 국방부는 29일 “1921년 6월 러시아공산당 극동공화국 군대가 자유시에 있던 독립군을 몰살시켰던 자유시 참변과 연관되어 있다는 의혹”을 언급하며, 홍범도가 “소련 공산당 군정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군 통합을 지지했고, 소련 공산당의 자유시 참변 재판에 재판위원으로 활동한 사실, 자유시 참변 발생 후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여 소련 적군 제5군단 소속 ‘조선여단’ 제1대대장으로 임명 등의 역사적 사실이 있다”고 밝혔다. ‘홍범도가 자유시 참변 당시 독립군 몰살을 주도했다’.
는 등 일부 극우 커뮤니티와 매체들이 퍼뜨려온 괴담을 국방부가 은근히 지지해주는 모양새다.
자유시 참변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의 파벌 싸움에서 비롯한 사건으로, 만주에서 온 홍범도로선 여기에 간여할 이유도 힘도 없었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일본이 만주 일대에서 독립군 토벌에 힘을 쏟자, 독립군 부대들은 이를 피해 1920~1921년 소비에트 러시아의 위성국가인 극동공화국 내 자유시(스보보드니)에 집결해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 및 극동공화국의 지원 아래 대규모 통합부대를 결성”하려 했다고, 자유시 참변을 깊이 연구해온 윤상원 전북대 사학과 교수는 논문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 사변’에 밝혔다. 일본과 소비에트 러시아는 적대 관계였다.
그런데 1921년 1월 러시아 공산당이 맡아오던 극동지역 지원 업무가 전세계 공산주의 조직인 ‘코민테른’으로 이관되면서, 코민테른과 연결된 이르쿠츠크파(고려혁명군)와 독립군 통합의 주도권을 행사해온 상하이파(대한의용군) 사이의 갈등이 불거지고, 1921년 6월28일 극동공화국 군대가 ‘치안 유지’를 이유로 대한의용군을 ‘무장해제’시키면서 사상자가 발생했다. 홍범도 등 간도에서 옮겨온 독립군 대부분은 통합 주도권이 대한의용군에서 고려혁명군으로 넘어가는 것을 인정했다. 학계에서는 “‘무장부대 통합’이라는 명분과 ‘소련 및 코민테른의 권위’에 대한 인정, 그리고 ‘무기 및 식량의 원활한 공급’이라는 현실적 조건에 대한 고려 때문”(윤상원, 같은 논문)이었다고 본다. 독립군 연구 권위자인 반병률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홍범도 등 간도 독립군들은 당시 그쪽에 몸을 기탁한, 이를테면 ‘손님’이었다. 그는 코민테른의 결정에 반발할 이유가 없을뿐더러, 무장해제 결정 과정에 간여하거나 영향을 준 일도, 진압 과정에 동원된 일도 없다”고 지적했다. 자유시 참변 당시 홍범도가 “장교들과 솔밭에 모여 땅을 치며 통곡”(‘한국독립운동사자료집-홍범도’)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대한의용군에 대한 재판 과정에 홍범도가 재판위원으로 참여한 사실도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된다. 자유시 참변은 곧바로 국제사회에서 첨예한 논쟁을 일으켰는데, 이르쿠츠크파는 명망과 권위가 높은 항일의병장 홍범도를 재판위원으로 삼음으로써 신속한 사태 수습을 시도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재판 결과 실형(징역형 2년)을 받은 독립군은 3명뿐이었다. 이후 진상 규명 과정에서 홍범도를 비롯한 간도 출신 독립군들은 정파 싸움에서 ‘들러리’로 희생당했다는 취지의 성명을 내기도 했다.
홍범도가 ‘이르쿠츠크 회군’ 뒤 소련 적군 제5군단 소속 ‘조선여단’ 제1대대장으로 임명된 것을 두고도, ‘홍범도가 적군에 가담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1921년 8월 일본의 집요한 요구로 극동공화국에 주둔할 수 없게 된 고려혁명군은 이르쿠츠크로 이동해야 했고, 이때 독립군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형식적으로 ‘적군 소속’을 부여했고 독립군은 현실적으로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는 풀이가 나온다.
홍범도 흉상 이전 등 국방부의 시도에 대해, 반병률 교수는 “‘공산주의’라고 ‘김일성’과 같은 말이 아니다. 독립군의 역사도, 공산주의의 역사도 이처럼 복잡한데, 이를 입맛에 맞게 단순화시켜 확대해석하면 안 된다”고 비판했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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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들에 대해 역사를 역사답게 알려주는 황현필씨의 촌철살인 같은 강의를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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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 사회주의 vs. 공산주의
유대계 독일인이자 1850년대 산업혁명이 한참 일어나던 영국으로 이주한 칼 마르크스가 당시 방직공장이나 탄광에서 착취당하고 보수도 못받고 죽어나가던 아이나 노동자들을 목격하고 자본주의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된다. 이에 <자본론>이란 책에서 자본주의는 그 자체적인 결함떄문에 언제간는 붕괴되고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사회가 올것이라고 주장했다. 단,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사회도 완벽하지 않으므로 과정상에서 자본주의 색체를 다 뺄 때까지 노동자들의 독재기간이 필요하며 이 것이 사회주의사상이며, 아울러 이 시기를 거치고 나면 지상낙원인 누구나 일한 만큼 보상받고 누구나 평등한 공산주의가 온다라고 말했다.
결국 이 지구상에 한 번도 공산주의가 실현된 적은 없다.
북한은 사회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니고 3대 세습 독재국가일 뿐이다.
그로부터 10년 후, 칼 마르크스도 죽은 후 1860년대 유럽에서 가장 가난했던 러시아에 대기근이 찾아오는데 이 떄 황제는 '국민이 굶어죽어도 농산물을 외국에 다 수출하라'고 했다. 결국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이때 러시아 농민들이 칼 마르크스 주장이 침투되기 시작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전하고 먹을 게 없었던 농민과 노동자들 15만명이 궁정에 가서 먹을 걸 요구하는데 황제는 1월 9일 발포를 명령하고 국민들을 죽였다. 이때 군인들조차도 제대로 먹지 못하던 상황인지라 민중 편에 서서 황제하야를 주장했다. 이때 황제는 물러서지 않고 의회 설립안을 제안하는데 민중은 황제하야 강경파와 의회설립 온건파로 갈라진다.
이후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독일과 러시아가 전쟁을 하던 상황에서 니콜라이 2세 황제 옆엔 요승 라스푸틴이 나타나게되어 니콜라이 2세는 전장으로 나가게 하고 왕궁과 민중을 기만하게 되는데 급기야 국내정세가 어지럽다보니 독일과의 전쟁보다도 국내 문제를 해결하자는 민중의 데모가 시작되면서 황후와 라스푸틴은 데모민중을 진압하게 하는데 결국 이에 반발하여 어머니들이 군인이던 아들들을 지키기 위해 일어나게 되고 황실은 이런 어머니들을 진압하라고 명하게 되면서 진압하던 병사들 조차도 혁명을 지지하며 1917년 2월 블라디미르 레닌이 주도하는 볼세비키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혁명이후 니콜라이2세와 황후, 라스푸틴은 쫓겨나나 결국 남겨진 권력과 부는 왕실이나 귀족들이 차지하게 된다. 이에 1917년 10월 농민과 노동자의 연합인 소비에트가 당시 의회를 점령하고 있는 부르조아와 왕당파 척결을 하게 된다. 그러나 왕당파와 부르조아가 합세해 농민/노동자와 싸우게 되는데 1922년 농민/노동자가 이기면서 소비에트연방(소련)을 만들게 된다.
즉 레닌이 만든 소련은 스탈린의 소련은 다르다. 레닌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도 실패했다.
결국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윌슨대통령이 "모든 식민지국가들은 스스로 운명을 결정하라"는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는데, 이때 레닌은 모든 제국주의 악이라면서 식민지 독립을 무기, 군량미, 군자금 등을 지원하게 된다.
바로 이때 1922년 소련이 막 만들어진 그해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한 홍범도장군이 레닌을 만나 조선독립을 위해 도움을 받은 것이다.
즉 홍장군은 이념적으로 공산주의나 공산당 가입 및 활동이 목적이 아닌 나라와 민족의 독립을 위한 것이었고, 이후 연해주에서 러시아로, 또 러시아에서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당하면서 무장해제 당하고 같이 독립전쟁을 했던 부하들과 식솔들의 먹거리와 연금을 지원받기 위해 공산당에 가입하고 결국 고려극장의 수위로 일하다 타국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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