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역사를 역사답게 파헤쳐준다는 자칭 역사가인 황현필씨가 한국사 최악의 빌런 5인을 소개했다.
1.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 결코 그렇게 부르고 싶지 않다고.....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배재학당을 졸업한 후 고종이 영어를 잘하는 이승만을 미국으로 보낸 후 미국 하버드대학교 석사와 프린스턴대학교 정치학 박사를 수료했다. 당시로는 나라도 없는 상황에서 한국 최초의 박사학위 수여자였다.
1919년 4월 임시정부 수립 시 초대총리를 맡았고 1919년 9월 통합임시정부가 수립후엔 초대 대통령을 맡았다.
일반적으로 이승만이 이때부터 독립운동가로 인정하나 실은 그 이전인 이승만이 미국생활 당시 1909년 미주지역의 한인들이 연합 결성한 대한인국민회에서 안창호, 박용만과 함께 단체를 이끌었다.
그런데 이때 이승만은 자기가 두각을 나타내고 앞에 서야하는 분열주의자이다 보니 미국인들의 지지를 잃고 하와이로 건너갔다고 한다.
하와이에 도착한 이승만은 당시 일찌감치 미국 본토에서 하와이로 건너온 박용만의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그때 박용만은 집이 부유하여 하와이에 땅을 사서 한국인들을 살게 하고 하와이주정부로부터 군대를 만들 수 있는 허락을 받아 군사교육단체인 '대조선국민군단'을 조직해 낮엔 사탕수수밭에서 일하고 밤엔 훈련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마침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일본 군함이 정박할 일이 생겨 박용만이 군함폭파계획을 수립했으나 이승만의 밀고로 무산되고 박용만이 체포되는 일이 벌어졌다. 물론 이승만의 핑계는 '나는 평화주의자'로 '미국 땅에서 한국인이 폭력거사를 하면 한국 외교독립에 지대한 악영향을 초래한다'고 했다. 이때부터 의형제간이었던 이승만과 박용만의 적이 되었다.
이승만이 임시정부 대통령이 된 후, 박용만을 외교부장관으로 추대했으나 박용만은 '나는 이승만과 일할 생각이 없다. 향후 나라가 해방이 될텐데 해방된 나라에 이승만이 만족의 지도자가 되는 것은 민족의 큰 비극이다'라고 했다.
단재 신채호도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면 나는 임시정부에 있을 수 없다'라고 하며 뛰쳐 나갔다.
어쩃든 이승만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이 된 후, 1925년 탄핵을 당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6년간 상해에 머문 건 6개월뿐이고 나머진 미국에서 호위호식했으며 독립자금도 사적으로 운용하였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1919년 2월 이승만은 당시 미국 대통령인 일슨에게 일본인의 식민통치 대신 국제연맹의 식민통치를 먼저 받겠다는 <위임통치청원서>를 써 보냈다.
이에 대해 단재 신채호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더니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으니 더 큰 역적이다"라고 한탄하며 1923년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를 열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결정하고 2년 후인 1925년 이승만을 탄핵하기에 이르렀다.
대한민국 헌법에 입각하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되어 있으니, 한국역사상 최초의 탄핵된 인물은 이승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1948년 해방된 나라의 초대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탄핵된 경험떄문인지 대통령직에 집착이 강한 너머지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4알 사전투표, 3~5인조 공개투표, 완장부대 배치 등 3.15부정선거를 실시하고 결국 부패와 부정선거에 반대한 학생과 시민들에 의해 4.19혁명이 발발하여 일주일 후 자진하야를 하고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지금도 일부단체는 이승만을 독립운동가이자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하고 그는 영국의 처칠과 견주어 기념관건립까지 추진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황현필 역사가는 역사를 제대로 들여다 보지 못한 오해라고 한다.
영국의 처칠처럼 군사지휘권도 없었고 군대를 이끌고 싸우지도 않았고, 프랑스 드골처럼 망명 프랑스를 이끌고 싸우지도 않았으며 미국의 워싱턴처럼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지도자가 되어 군대를 이끌고 싸우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식민통치당세에 미국에서 외교독립을 하다하며 해방 후 미국과 소련이 냉전주의를 들어가며 김구식과 김구보다는 분단주의자이자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던 이승만을 올린 것이라 한다.
김구도 공산주의를 싫어했다. 당시 70대인 김구는 남한의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며 북한의 김일성(당시 30대)을 만나 통일한국을 논하고자 했는데 이를 반공주의자들은 김구가 남한을 북한에 바치려했다고 매도했다는 것이다.
김구는 38선을 넘을때 "3천만 동포에게 울면서 고한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데 협력하지 않겠다'고 했다.
더구나 이승만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몇 시간만에 대전까지 내려오고 라디오를 통해선 서울에 있다고 거짓방송을 하며 우리 군인이 잘 지키고 있으니 피난가지 않아도 된다고 전한다.
대통령을 하는 동안도 1952년 발췌개헌, 1954년 사사오입, 1958년 진보당사건, 1959년 경향신문폐간, 1960년 3.15부정선거 등 많은 실정이 있었다.
역사를 통해 가장 많은 민간인이 살상된 때가 이승만때가 많다고도....
제주 4.3사태때 민간인 학살이 많았는데 한국전쟁 때 제주도로 피난가는 것을 고려해 4.3사태때 죽은 사망자의 유족이 보복을 할까봐 그들을 죽이라고 명령을 하고 군인들이 내려와 결국 수많은 사람들을 총살했다고 한다.
이 것은 2차 세계대전때 제주도에 일본군 전투기이륙을 위해 활주로를 만드는데 미군이 폭격을 많이 가했던 웅덩이에 위령비가 있는데, 그 자리에 군인들에게 끌려가던 사람들이 나중에 가족에게 자신의 죽음을 알리려고 고무신을 벗으놓은 흔적이 있고 위령비엔 엄연히 "대한민국 군인이 이승만의 명령을 받아서 민간인을 살상한 곳'이라고 적혀있다고 한다.
이때 죽은 사람이 신고된 것만 14,028명, 유가족 28,561명, 신고누락과 행방불명 등 모두 합해 정부추산 희생자수가 3만여명에 이르니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라 칭하고, 기념관을 건립한다는 것은 역사에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한다.
2, 원균
이순신이 수년간 일본의 침략을 막으며 최고의 수군을 가지고 한번도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칠천량해전에서 대패를 하며 정유재란의 단초를 제공하였으며, 자신의 잘못을 감추고 이순신을 모함하고 힘들게 만들었다.
3, 고구려 멸망(668)의 단초가 된 연개소문의 장남, 연남생
4. 민비
자신의 권력을 위해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이고,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을 청나라로 불모로 끌려가게 했다.
5. 김일성, 6.25전쟁 발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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