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님, 제발 아무 것도 하지 마세요 [이봉렬 in 싱가포르]
[반도체 첫 번째 특별과외] 대통령 말에 경악... 이건 특별과외가 필요하다
누구도 말해주지 않는 반도체의 두 얼굴
안녕하세요. 요즘 대통령님이 반도체에 관심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난 7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반도체 산업은 국가 안보 자산이자 산업의 핵심"이라면서 "교육부뿐만 아니고 전 부처가 인재양성을 위해 특단의 노력을 기울여달라"는 말을 했었죠?
참석한 장관들에게 "각자 더 공부해서 수준을 높여 달라. 과외선생을 붙여서라도 공부를 더 해서 오시라"는 말도 했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과외선생이 필요한 건 대통령님이 아닐까 싶습니다.
반도체에 대한 최소한의 상식만 있었어도 청정도가 최우선인 반도체 웨이퍼 팹에 방진복도 안 입고 들어가는 실수를 할 리가 없을 테니까요.
전 부처에 특단의 노력을 지시할 정도로 반도체를 중요하게 여긴다면 전문적인 지식은 아니더라도 기본적인 상식 정도는 알아 두는 게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아서 대통령님의 '과외선생'을 자청해서 이 글을 씁니다. 그래도 되겠죠?
'네가 누군데 감히 나를 가르치려 하느냐'고 할까 봐 제 소개를 먼저 하겠습니다.
전 1988년, 삼성전자가 4메가 D램을 막 개발했던 그 해에 바로 그 회사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 뒤로도 국내외 반도체 회사에서 계속 일을 했고, 30년이 더 지난 지금은 시스템 반도체를 만드는 유럽 반도체 회사의 싱가포르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 경력이면 아주 자격이 없는 건 아닐 겁니다.
대통령님에게 기본 상식을 알려 주는 게 목적이기 때문에 반도체에 대해 최대한 쉽게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반도체 산업의 분류
반도체 산업의 가장 기본적인 분류는 제품에 따라 메모리와 비메모리로 나뉘는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주로 만드는 것이 메모리 반도체입니다.
제가 지금 일하는 회사에서 만드는 건 비메모리 반도체인데, 요즘은 주로 시스템 반도체라고 부릅니다. 인텔, AMD, 퀄컴, 엔비디아 등이 비메모리 반도체의 대표적인 회사입니다.
한국의 반도체 회사들이 메모리 시장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지만 전체 반도체 시장을 보면 비메모리 시장이 70% 이상으로 더 큽니다. 한국 반도체 회사들의 비메모리 시장 점유율은 약 3%정도로 그 비중이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반도체 제조 방식에 따른 분류도 알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반도체 회사는 어디일까요?
글로벌 시장분석기업 가트너의 조사에 따르면 삼성전자가 2021년 매출액 기준으로 1위입니다. SK하이닉스가 3위를 차지해서 한국이 반도체 강국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인텔이 2위를 차지했고 그 뒤로 마이크론, 퀄컴, 브로드컴 같은 회사가 따르고 있습니다. 상위 10개 회사가 전체 반도체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이 넘습니다.
그런데 이 상위 10개 반도체 회사 중에서 실제로 반도체를 생산하는 회사는 절반인 다섯 개뿐입니다.
퀄컴, 브로드컴, 미디어텍, 엔비디아, AMD는 반도체 생산 시설이 없습니다. 반도체를 가장 많이 판매하는 회사들이 실제로는 반도체를 만들지 않는 이유는 이어서 설명하는 반도체 사업 형태에 따른 분류를 알면 이해가 될 겁니다.
반도체 회사의 일반적인 형태는 종합 반도체 기업(IDM, Integrated device manufacturer)입니다. 반도체의 개발과 설계를 한 후 웨이퍼 팹(Fab : fabrication facility)이라 부르는 생산시설에서 직접 만들어 유통하는 형태입니다. 삼성반도체와 SK하이닉스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처음에는 대부분의 반도체 회사가 이 같은 형태였으나 기술력과 대규모 자본력을 모두 갖춰야 하기 때문에 팹리스(Fabless)회사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팹리스는 웨이퍼를 생산하는 팹이 없는 회사라는 뜻으로 반도체 설계를 전문적으로 하고 생산은 나중에 설명할 파운드리 회사에 외주를 맡깁니다. 처음에는 기술력은 있으나 자본과 인력이 부족한 작은 회사들이 팹리스를 했으나, 지금은 AMD나 퀄컴 같이 큰 회사들도 기존의 팹들을 분리하여 팔고 팹리스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팹리스 업체에서 외주를 받아 반도체를 전문 생산하는 회사를 파운드리(Foundry)라 부릅니다. TSMC, 글로벌파운드리가 대표적인 파운드리 회사이며 삼성전자도 파운드리 사업에 뛰어 들었습니다. 가트너의 반도체 업체 순위 조사에서는 파운드리 업체를 제외했지만, 매출액을 보면 파운드리만 하는 TSMC가 전체 반도체 회사 중 3위일 정도로 파운드리 사업의 규모는 거대합니다.
반도체 미세공정 경쟁 혹은 나노미터 경쟁에 대해 들어 본 적 있을 겁니다. 여기서 나노미터란 반도체 칩 속 전기 회로의 선폭을 말합니다. 숫자가 작을수록 같은 크기의 칩에 더 많은 회로를 새겨 넣을 수 있습니다. 1나노미터는 10억분의 1미터로 머리카락 굵기의 2000분의 1 정도됩니다. 3나노미터 공정이라고 하면 3억분의 1미터 정도 되는 전선을 반도체 칩에 새겨 넣는다는 말인데 이렇게 가는 전선을 이용하면 칩의 크기는 작아지고, 처리속도는 빨라지고, 전력소모와 발열은 줄일 수 있습니다. 현재 이런 공정미세화 경쟁에서 가장 앞서는 회사가 TSMC, 삼성전자, 인텔입니다.
이런 미세공정을 적용해서 반도체를 생산하는 팹 내부는 그야말로 먼지 하나 없는 청정구역입니다. 먼지 하나가 선폭의 몇 배에서 몇 백배까지 더 크기 때문에 먼지가 회로 위에 떨어지면 바로 불량이 발생합니다. '클래스 1' 수준의 청정도를 유지하는 삼성전자의 최신 팹에는 가로와 세로, 높이가 각 1피트(ft)인 정육면체 공간 안에 0.5마이크로미터 보다 큰 먼지가 하나 정도 있는 수준으로 관리되고 있습니다. 얼굴에 묻어 있는 화장품 가루가 떨어져서 불량을 만들까 봐 팹에서 일하는 여사원들 화장도 못하게 하는 정도로 관리한다고 이해하면 됩니다.
반도체 산업의 생태계
여기까지 설명을 듣고 '한국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메모리 반도체에서 세계 선두이니 앞으로 이 두 회사에 인력도 많이 공급하고 여러가지 편의도 봐 주고 규제도 풀어주고 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반도체 생태계에는 설계부터 웨이퍼 생산까지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
반도체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장비가 필요합니다. 노광기를 만드는 ASML 같은 경우에는 장비 한 대당 가격이 수 천억원이 넘는데도 공정미세화를 위해 꼭 필요하기 때문에 반도체 회사들이 그 장비를 사려고 늘 줄을 서 있습니다. AMAT나 LAM 같은 장비 회사 역시 특정 공정에서 독점에 가까운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반도체 장비 회사의 발전 속도에 따라 반도체 기술 전체의 수준이 결정되기도 합니다.
반도체 장비에 쓰이는 각종 부품을 만드는 회사들도 반도체 생태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로봇, 모터, 베어링, 전자기판, 센서…, 수많은 부품이 모여 장비를 구성하고 장비를 운영하는 동안 주기적으로 바꿔줘야 하기 때문에 신뢰성 있는 부품을 만드는 회사들이 많을수록 반도체 장비도 잘 만들 수 있습니다.
웨이퍼 팹에 사람과 장비만 있다고 반도체를 만들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가스, 케미컬, 금속류 등 생산에 필요한 수많은 원재료들이 필요합니다. 2019년 7월 일본이 주요전략수출품목에 대한 수출을 규제하겠다며 포토레지스트, 불화수소 등을 규제 품목으로 정했는데 이 둘은 반도체 생산 공정에 꼭 필요한 케미컬류입니다.
이 사건 이후 반도체에서 소재 산업의 중요성에 모두가 눈을 뜨게 됐습니다. 가스, 케미컬 같은 소재, 반도체 장비의 부품, 그리고 반도체 생산 장비의 앞 글자를 따서 '소부장' 산업이라고 한다는 것도 기억해 두면 좋겠네요. 반도체를 생산하는 팹이 있는 곳에 소부장 산업도 함께 발전할 수 있습니다.
이 밖에도 반도체 설계와 관련된 특허만을 담당하는 기업(IP 기업), 팹리스 기업이 설계한 제품을 파운드리 생산공정에 최적화할 수 있도록 돕는 디자인하우스, 팹에서 생산된 웨이퍼를 개별 제품으로 만드는 후공정 기업, 제조 공정에 사용된 부품을 세정 혹은 재생하여 다시 공급하는 기업, 중고 반도체 장비를 거래하는 기업, 팹을 건설하고 유지 보수하는 기업… 등 수많은 형태의 기업들이 반도체 생태계를 구성하고 있고 그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습니다.
한마디로 한국의 반도체 기업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반도체 강국들이 반도체 생산을 직접하지 않는 이유1
이쯤에서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왜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은 한국이나 대만, 중국처럼 공격적으로 웨이퍼 팹을 짓는 대신 팹리스에 더 집중하는 것인지', '왜 파운드리 하는 회사들은 한국, 대만, 싱가포르 등 아시아 국가에 팹을 주로 짓는지' 같은 거 말입니다.
짐작하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돈입니다. TSMC 창업자인 모리스 창 전 회장이 얼마 전 한 팟캐스트에 출연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미국 TSMC 공장의 25년 제조 경험에 따르면) "미국 내 반도체 제조 비용이 대만보다 50%가량 많다."
인건비가 상대적으로 낮은 한국, 중국, 대만, 싱가포르 등 아시아에 팹을 지으면 비용을 많이 아낄 수 있는 겁니다. 미국에 본사가 있는 대표적인 파운드리 업체 글로벌파운드리도 대부분의 팹이 아시아에 있습니다. 팹리스 업체들도 같은 이유로 자사 팹은 포기하고 아시아의 파운드리 업체에 생산을 맡깁니다. 아시아국가에서 제조 비용이 낮은 이유는 인건비가 싸고, 안전이나 환경 보호에 들여야 할 비용을 상대적으로 적게 쓰기 때문인데 이건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두번째는 반도체 팹에서 일할 노동자 확보 문제입니다. 1년 365일, 하루 24시간 계속해서 팹을 가동해야 하는 특수성 때문에 반도체 공장 노동자들은 교대근무를 하게 됩니다. 청정도 유지를 위해 기압을 높여 놓은 팹 안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뒤덮는 방진복을 입고 마스크에 보안경까지 쓴 채 주야간 교대 근무를 해야 하는 노동환경 때문에 선진국에서는 팹 안에서 일하는 오퍼레이터를 구하는 게 쉽지가 않습니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의 상황은 좀 다릅니다.
1991년 삼성은 "새벽 3시의 커피타임 이야기"라는 광고를 신문과 잡지에 싣습니다. 16메가 디램 개발을 위해 연구원들이 퇴근도 못하고 밤새 일한 걸 자랑한 건데, 이런 일이 처벌대상이 아닌 자랑거리가 되는 나라가 한국이었습니다. 30년 전 이야기를 너무 우려먹는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 이건 어떨까요? 임형규 전 삼성전자 사장은 얼마 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발언을 했습니다.
(1984년도부터는 1년에 150명 정도 병역 특례를 줬는데) "얘들이 그야말로 군대에서 하듯이 밤새 일했다. 맨날, 월화수목금금금, 매일같이 십 년 정도 하니까 도가 트인 거다."
당시 그 회사에 다니던 저 역시 그 "애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저의 동기들은 대부분 병역특례를 받은 후 실제로 그렇게 일했고, 전 병역특례를 받는 대신 회사를 그만 두고 군대에 갔습니다. 사실 이건 노동착취와 다를 게 없는 일인데 임 전 사장은 2022년에도 자랑삼아 말하고 있습니다. 삼성 경영자들의 마인드가 지난 30년 동안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걸 보여 줍니다. 오퍼레이터든 엔지니어든 연구원이든 이렇게 "군대에서 하듯이 밤새 일"하는 노동자들을 미국이나 유럽의 팹에서 구하기는 힘들 겁니다.
얼마 전 <파이낸셜타임스>는 "TSMC가 미국 인력확보 전쟁에서 힘든 상황에 부딪혔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습니다. 미국내 TSMC의 브랜드 인지도가 낮고, 연봉도 적으며, 회사에 충성을 요구하는 기업문화도 미국과 맞지 않아 구직자들이 잘 찾지 않는다는 내용입니다. 기사에는 TSMC의 연봉이 낮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미국 IT 대기업의 연봉을 도표로 만들어 넣었는데 비교 대상 중 TSMC보다 연봉이 낮은 회사는 삼성이 유일했습니다.
반도체 강국들이 반도체 생산을 직접하지 않는 이유2
세번째 이유는 노동자의 안전이 위협받기 때문입니다. 공장 안에 가 봐서 알겠지만 반도체는 먼지 하나 없는 넓은 공간에 최첨단 장비를 갖춘 미래산업이라는 이미지가 강합니다. 하지만 알고 보면 반도체 팹은 전형적인 3D 현장입니다.
반도체 장비는 겉으로 보기에는 깔끔하지만 공정이 이뤄지는 곳(챔버라고 부릅니다)은 온갖 가스가 반응을 하는 곳이기 때문에 상당히 지저분합니다. 식각 장비 혹은 CVD장비의 챔버를 열어 보면 화학 반응에 플라즈마 반응까지 이뤄진 공정부산물들을 볼 수 있는데 그걸 제거하는 엔지니어들은 반드시 방독면을 씁니다. 호흡기로 들어가거나 피부에 닿게 되면 치명적인 부상을 입을 수도 있어서 그런 겁니다. 그나마 장비는 깨끗한 편입니다. 장비와 연결된 펌프나 스크러버 같은 경우는 오래 사용 후 내부를 열어 보면 유해물질로 가득합니다. 정기적인 점검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더러운 건 눈에 보이는데 위험한 건 잘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도체 공장에서는 백가지가 넘는 유해가스와 케미컬을 사용하지만 각각의 물질들이 어디에 사용되고 또 얼마나 위험한지는 기업비밀이라며 잘 공개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연구논문 하나를 가지고 왔습니다. 2011년 <대한직업환경의학회지>에 실린 "반도체 웨이퍼 가공 공정 및 잠재적 유해인자에 대한 고찰"이라는 보고서는 웨이퍼 팹의 환경에 대해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공정에서 근로자의 건강에 장해를 줄 수 있는 화학물질을 사용하거나 물리적 유해인자를 유발하는 장치를 사용한다. 특히 웨이퍼 가공 공정별로 화학물질 교체, 장비 기계 교환 및 정비를 담당하는 정비 작업자의 유해인자 노출은 위험한 수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정 특성상 웨이퍼 가공은 수많은 유해화학물질을 사용해야 하므로 화학물질에 대한 노출가능성은 일반적이다. 또한 일부 공정에서는 자외선(포토), 라디오파(플라스마 식각, 금속증착 등), 엑스레이(이온주입) 등의 물리적 유해인자도 발생되므로 이에 대한 노출위험도 존재한다."
이러한 위험성은 보고서 상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삼성전자에서 일하다가 백혈병에 걸려 사망한 고 황유미씨 이야기는 들어 봤을 겁니다. 고인이 일했던 곳이 삼성전자 기흥 사업장 3라인이었고, 저 역시 그 라인에서 3년 가까이 일했습니다. 황유미씨는 죽었고 전 운이 좋아 아직 살아서 이런 글도 씁니다. 황유미씨의 이야기는 영화로도 나왔고, 이후 반도체 관련 직업병에 대한 조사가 이뤄져 2018년에는 삼성전자에서 일하다가 백혈병에 걸린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삼성전자가 공식사과까지 했습니다.
하나 더 보죠. 2019년,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서 10년간의 역학조사 이후 "반도체 제조공정 근로자에 대한 건강실태 역학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반도체 회사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의 경우 백혈병에 걸릴 위험성은 1.55배 높았고, 이 중 웨이퍼 팹 안에서 반도체 칩을 직접 다루는 20~24살 여성 노동자의 경우는 2.74배로 더 높았습니다. 백혈병 뿐만 아니라 위암이나 유방암 그리고 신장암 그리고 일부 희귀암도 발생 위험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를 자처하는 '반올림'을 비롯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와 땀을 흘렸는지 모를 겁니다.
마지막으로 환경문제를 빼 놓을 수 없습니다. 반도체 공장은 엄청난 양의 물을 사용합니다. 삼성전자 평택 공장 한군데서만 방류하는 물의 양이 하루 평균 6만톤에 이릅니다. 이는 인구 18만 명이 거주하는 경기 안성시의 하루 생활폐수와 맞먹습니다. 이 6만톤은 평택호로 흘러가게 되는데 그 물은 주변 도시의 농업용수로도 쓰입니다.
반도체 공장에서 사용한 뒤 하천으로 배출하는 물 상태는 어떨까요? 농업용수로 쓰기에 안전할까요? 삼성전자는 자사의 반도체 공장에서 방류한 물이 흘러가는 오산천에 수달이 나타났다며 친환경적이라고 홍보를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지난 1월 <블룸버그 통신>은 미국 오스틴에 있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106일간 최대 76만 3000 갤런(약 288만 8000리터)의 산성 폐수가 유출돼 인근 지류에서 물고기가 폐사하는 등 환경 피해가 발생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삼성전자 대변인은 이와 관련해 "산업폐수 내에는 황산염과 과산화수소가 섞여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한국에서는 폐수에 수달이 찾아온다는데 미국에서는 왜 물고기가 폐사하는 걸까요? 수달은 삼성의 홍보 수단에 불과하지만 폐사한 물고기는 반도체 공장에서 방류하는 물에 대한 진실을 알려주는 증거입니다.
수질오염만 문제가 아닙니다. 반도체 공장에서 사용하는 모든 가스들은 사용후 대기 중으로 배출이 됩니다. 물론 장비와 바로 연결해서 가스를 정화하는 1차 스크러버, 그렇게 걸러진 가스를 모아서 다시 정화하는 2차 스크러버를 거쳐 기준치 이하의 가스만 배출이 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스 정화시설이 충분하지 않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2006년, 부천의 한 웨이퍼 팹 주차장에 있던 자동차의 유리가 부식이 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한두 대가 아니라 주차장에 있던 거의 모든 자동차에서 동시에 발생했습니다. 그 날은 비가 내렸습니다. 제대로 정화되지 않은 채 배출되던 가스들이 비를 만나 액화가 되었고, 하늘에서 비가 아니라 케미컬이 떨어진 겁니다. 그 산성비를 맞은 차들은 모두 부식이 되었습니다. 회사는 직원들에게 함구령을 내리고 대신 유리와 차체를 모두 새것으로 교체해 주었습니다. 당시 그 회사에서 일했던 저 역시 차 유리를 바꿨습니다. 하지만 회사 주변 주택가의 차들도 유리가 부식되는 피해를 입었지만 회사가 그 사실을 숨기는 바람에 직원이 아닌 차주들은 피해 보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자동차 유리를 부식시키는 산성비를 사람이 우산 없이 맞으면 어떻게 될까요? 논밭의 식물 위에 떨어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 날은 비가 와서 공기 중으로 퍼져 나가던 가스가 땅으로 떨어졌지만 비가 오지 않았다면, 그래서 자동차 유리가 부식되지 않았다면 정화되지 않은 가스가 한동안 계속 배출되었을 겁니다. 환경 문제에 훨씬 더 까다로운 규제가 있는 선진국에서 반도체 팹을 쉽게 지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온갖 가스와 케미컬이 복잡한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반도체 팹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들여야 할 비용과 노력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반도체에 대한 제 설명은 여기까지입니다. 반도체 산업의 구조와 위험성까지 설명했는데 마치기 전에 마지막으로 간단한 퀴즈 하나 풀면서 내용을 잘 이해했는지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아래 보기 가운데 반도체 산업 관련해서 어떤 정책을 펴는 게 반도체 강국 한국의 최고지도자로서 올바른 선택일까요?
1. 반도체 산업의 발전을 위해 수도권공장총량제, 주 52시간 근무제, 환경영향평가 등 각종 규제를 풀고, 반도체 투자에 대한 세재 혜택도 주고, 대학마다 반도체 학과를 만들어 인력 공급을 위한 방안을 마련한다.
2. 종합반도체 산업에 편중된 반도체 산업의 다양화를 위해 기초학문에 대한 지원을 늘이고, 반도체 팹의 노동 조건을 지속적으로 조사해서 더 이상 반도체 노동자들이 암으로 죽는 일을 막고, 환경영향평가를 보다 철저하게 해서 한강이나 평택호로 흘러 가는 폐수는 안전한지, 반도체 건물 옥상 배기구에서 품어져 나오는 가스가 인체에 영향이 없는지 확인한다.
반도체 기업과 기업의 광고에 목을 매는 언론들은 반도체에 대한 지원만을 부르짖고 있지만 정책 결정자라면 안전과 환경을 걱정하는 다른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저는 반도체에 대해 기본적이고 상식선에서의 정보를 이야기했을 뿐이니 다른 전문가의 의견도 많이 듣고 현장 노동자의 목소리도 들어서 올바른 선택을 하길 기대하겠습니다.
[반도체 두 번째 특별과외] 반도체 15만 양병설 ... 실정도 모르는 헛발질... 강행 시 파국우려
안녕하세요. 지난 7월 19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반도체 관련 인재 양성방안'을 보고 받으셨죠? 대통령님께서 "교육부는 과학기술 인재를 공급하는 역할을 할 때만 의미가 있다. 그런 혁신을 수행하지 않으면 교육부가 개혁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발언을 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아서 이런 결과물이 나왔습니다. 앞으로 "10년 동안 반도체 인력 15만 명을 추가로 양성하겠다"는 내용이 핵심이네요. 대통령님은 공무원들이 지시사항을 빠르게 처리하는 모습에서 뿌듯함을 느끼셨겠지만, 저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백년대계라는 교육을 기업의 필요에 따라 이렇게 아무렇게나 뒤흔들어도 되나 하는 걱정이 앞섭니다.
지난 기사(윤석열 대통령 발언에 경악... 이건 특별과외가 필요합니다, http://omn.kr/1zjg5)를 통해 대통령님께 반도체 관련 특강을 해드렸습니다. 반도체 산업은 우리나라 수출의 20%를 차지할 정도로 효자 산업이고 고용 유발 효과도 크긴 하지만, 반도체를 생산하는 팹은 온갖 유독가스와 케미컬을 많이 쓰고 그에 대한 관리가 부실하면 환경 오염 및 인명 사고를 가져오기도 하는 위험한 곳이라 설명했습니다. 기억 하시나요? 오늘은 그런 반도체 산업에 과연 온나라가 나서서 인력을 몰아주는 게 맞는지, 인력난 해소를 위해 대학 정원을 늘리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는지 등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동아일보> 6월 10일자 기사 하나를 보시죠. 아래는 <용인 반도체 新공장 필요인력 1만여 명… 충원하려면 15년 걸릴판>이라는 기사 중 일부 내용입니다.
SK는 경기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120조 원을 투자해 메모리반도체 생산 공장(팹) 4곳을 짓는다. 2027년 상업 가동이 목표다. 이곳을 운영하기 위해 필요한 인력은 SK하이닉스 전체 직원(3만135명·지난해 말 기준)의 절반인 1만5000여 명. 팹에 투입될 반도체 전문 인력만 1만2000여 명에 달한다. – 동아일보
반도체 팹에서 일하는 사람들
팹은 반도체를 생산하는 공장입니다. 그 안에서 대당 가격이 수십억에서 수천억까지 하는 수백 대의 장비가 24시간 쉬지 않고 웨이퍼 위에 반도체 칩을 새겨 냅니다. 먼지 하나도 제품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클린룸 시설을 갖췄고, 그 안에서 노동자들은 방진복을 입고 일합니다. 얼마 전 바이든 대통령과 함께 방문했던 삼성전자 반도체 생산 공장이 바로 팹입니다.
이 팹에서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이들은 오퍼레이터(제조직 사원)입니다. 팹 안에서 장비와 가장 가까이 있으며 웨이퍼 제조를 책임지는 사람들입니다. 보통의 경우 고졸 여성이 이 일을 많이 합니다. 삼성전자 기흥 3라인에서 일하다 백혈병을 얻어 사망한 고 황유미씨가 바로 오퍼레이터였습니다. 근무 시간 내내 방진복을 입고 일해야 하기 때문에 힘들기는 하지만 일 자체는 별도의 교육을 받으면 금방 익힐 수 있는 일이라 진입장벽이 높진 않습니다. 요즘 새로 짓는 팹은 자동화가 잘 되어 있어 오퍼레이터의 수가 크게 줄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반도체 장비를 유지 보수하는 장비 엔지니어가 있습니다. 제가 삼성전자에 입사할 때만 해도 장비 엔지니어는 공고 졸업생을 뽑아 교육을 시켜서 일을 맡겼습니다. 그 후로 점차 전문대 졸업생을 뽑더니 요즘은 대졸자들을 뽑아 배치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 일 역시 장비 제조 회사 혹은 사내 교육 시설에서 일정 기간의 교육을 받거나 선배들로부터 일대일로 배운다면 1,2년 안에 맡은 일을 해낼 수준이 됩니다. 게다가 요즘은 장비 제조 회사와 계약을 맺고 기본적인 유지 보수를 맡기기 때문에 예전보다 기술이나 기능이 덜 필요한 경우도 있습니다.
단위 공정의 관리와 개선을 담당하는 공정 엔지니어의 경우는 보통 대졸자 중에서 뽑아 배치합니다. 석사 혹은 박사 학위를 가진 이들이 이 일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반도체 인력 부족을 이야기할 때 연구개발 인력과 함께 가장 많이 언급되는 대상이기도 합니다. 반도체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있으면 좋지만 물리, 화학, 재료 등의 전공 지식이 있다면 실제 반도체 공정은 직무 교육을 통해 습득할 수 있습니다. 산화, 포토, 식각, 박막, 금속배선 등등 반도체를 만드는 기본적인 공정은 정해져 있지만, 각 회사마다 만드는 제품이 다르기 때문에 실제 적용되는 공정은 현장에서 배우는 게 가장 효율적입니다.
이 밖에도 소자, 품질관리, 테스트 등 다양한 부서에서 일하는 엔지니어들이 있는데 이들 역시 공정 엔지니어와 마찬가지로 대학에서 기초학문을 공부한 후 현장에서 1,2년 정도의 교육을 거치면 큰 어려움 없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뭔가를 개발하는 게 아니라 이미 30년 넘게 운영되고 있는 팹에서 저마다 필요한 부분을 개선해 나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시설이나 자재, 구매, 회계 등 팹을 운영하기 위해 필요한 지원부서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굳이 반도체를 전공하지 않아도 됩니다.
살펴본 바와 같이 팹 운영을 위해 가장 많이 필요한 오퍼레이터와 장비 및 공정 엔지니어, 그리고 여러 지원 부서 인원들 대부분이 반도체를 전문적으로 전공하지 않아도 실제 일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기계, 전자, 화학, 물리, 재료, 환경, 컴퓨터 소프트웨어 등 다양한 전공의 기술자들이 서로 협력하며 일하는 곳이 반도체 팹입니다.
무엇보다도 반도체 산업은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는 최첨단 산업이라 오랜 기간 교육을 통해 준비된 우수한 인재가 많이 필요하다는 생각 자체가 그냥 허구입니다. (여느 다른 회사와 마찬가지로) 반도체 회사 안에서도 일정 수준의 기능과 기술로도 충분한 일이 있고, 세계 최고의 인재가 뛰어난 실력을 보여줘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일정 수준의 기능과 기술만으로 충분한 경우가 더 많습니다.
외국 반도체 회사는 인력을 어떻게 충원하나
'그래도 반도체인데 설마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드시나요?
잠깐 싱가포르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싱가포르에는 글로벌 파운드리, 마이크론, STM 같은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회사의 팹이 많습니다. UMC, SSMC 같은 유명 파운드리 회사의 팹도 있습니다. 메모리 팹, 비메모리 팹이 다 있으며, 팹 중에서 최첨단 시설로 구성되는 300mm 팹의 경우도 이 작은 도시국가에 다섯 개나 있을 정도로 반도체 강국입니다. 여기서는 어떻게 반도체 인력을 충원할까요?
오퍼레이터는 주로 중국이나 인도에서 데리고 옵니다. 영어로 자연스럽게 의사소통하는 것조차 어려운 이들이 많지만 짧은 현장 교육만으로도 라인에서의 맡은 일을 충분히 해 냅니다.
장비 엔지니어는 필리핀, 인도, 말레이시아, 중국 등에서 온 이들이 많습니다. 기계나 전기, 전자 분야의 학사 학위 소지자로 다양한 산업분야에서 일한 경험을 가지고 싱가포르에 온 사람들이며, 반도체 일은 처음 해 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다들 금방 배우고 또 잘 해냅니다.
공정 엔지니어를 비롯해서 일정 수준 이상의 반도체 기술과 경험이 필요한 직군은 싱가포르에서 대학을 졸업한 이들이나 이웃 동남아 국가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들이 주로 맡아 합니다. 이들 중에도 입사 전에 반도체를 전공한 이들은 거의 없습니다. 외국 반도체 회사에서의 경력이 있으면 쉽게 취업이 가능하기는 합니다.
세계 최고의 반도체 회사들이 너무 사람을 대충 뽑아 쓰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실제로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어느 산업이든 우수한 인재가 많이 있다면 더 좋을 뿐, 특별히 반도체라서 온 나라 인재를 다 끌어 모아야 할만큼 특별한 건 아닙니다.
"교육부가 개혁의 대상이 될 수 있다"라는 대통령님의 엄포 때문인지 교육부는 장관 취임 보름도 안 된 시점에 향후 10년간 고졸 3만4천 명, 전문학사 1만6천 명, 학사 5만4천 명, 석사 1만5천 명, 박사 7천 명 등을 반도체 업계에 공급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백년을 내다보는 큰 계획을 그려야 할 교육부가 흡사 직업훈련원이 된 것 같습니다. 반도체 업계에 인력이 필요한 건 지금인데, 지금 대학 정원을 늘리고 반도체 관련 교육을 시작하면 4,5년 뒤에나 현장 투입이 가능할 겁니다. 그 때 반도체가 불황이고 해운업이 활황이면 또 그 분야 대학 정원을 늘여서 필요한 인력을 공급할 건가요?
대학 정원 늘려 인력 공급하겠다는 위험한 발상
정부의 방침대로라면 10년 후 반도체 산업의 인력 수요는 12만 7천 명인데, 공급은 15만 명이 됩니다. 게다가 수요는 반도체 산업이 연평균 5.6%의 고성장을 유지할 때를 가정한 숫자인데, 공급은 이미 확정해 두었으니 성장이 예상치를 밑돌게 되면 공급이 수요를 크게 넘어설 수도 있습니다.
기계, 전자, 물리, 화학, 재료 등은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쓰일 수 있지만 반도체 전공은 어떻습니까? 정부의 결정에 따라 갑자기 늘어난 반도체 전공자들이 반도체가 아닌 다른 산업에서도 환영받을 수 있을까요? 교육부는 반도체 학과의 정원을 늘리는 걸 대책이라고 내놓았지만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한 때 교편을 잡았던 원광대 반도체·디스플레이학부는 정원 미달로 인해 올해 3월 문을 닫았습니다. 인력 부족 문제가 대학에 반도체 학과가 부족해서가 아니란 뜻입니다.
사실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같은 대기업에서 일할 인력을 구하는 건 지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 대기업에 취업을 원하는 사람이 많으니까요. 한국에서 반도체 사업이 시작된 이후로 지금까지 기업들은 정규 교육과정을 마친 학생들을 매년 공채로 뽑은 후 교육을 시켜 반도체 기술자로 키워왔습니다. 다만 호황과 불황이 반복되는 산업 특성상 필요한 인력을 늘 충분히 확보해 두지는 않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갑작스러운 호황기에 팹을 건설하려고 해도 즉각적으로 배치할 인력이 없는 것뿐입니다. 기업들이 필요할 때 필요한 인력만을 채용했을 뿐 가까운 미래를 위해 사람에게 미리 투자하는 걸 하지 않았기 때문에 호황을 맞아도 사람이 없어 대응을 하지 못하는 겁니다.
반도체 인력난 사업체의 대부분은 중소기업이라는 조사결과도 있습니다. 지난 6월 15일 <연합뉴스>가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산업기술진흥원의 2021년 산업기술인력 수급 실태조사 결과를 분석해 보도한 내용을 보면 반도체 산업 부족인력의 90%가 중소기업에 몰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해당 사업체가 필요로 하는 인력을 학력별로 살펴보면 고졸인력이 68.2%로 가장 많았고, 전문학사 17.1%, 학사 13.7%, 석사 이상 0.9%였습니다. 반도체 관련 중소기업들은 고졸 및 전문학사가 필요하다는데 정부는 대학의 반도체 관련 정원을 늘리는 걸 대책이라고 내놓은 겁니다.
정부의 방침대로 대학 정원을 늘리고 반도체 관련 특화된 교육을 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기업들은 더 더욱 사람에 대한 투자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껏 회사에서 해 왔던 기술 교육을 학교에 떠맡기면 되는데 굳이 직원을 미리 채용을 하고 교육을 시키며 미래를 준비할 기업은 없을 테니까요. 반도체 산업 성장이 멈추면 당장 신규채용부터 줄어들 겁니다.
반도체를 전공한 인력이 필요하다면 삼성전자공과대학교 같은 개별 기업의 사내대학 규모를 키우고, 협력업체의 인력에게도 문호를 개방해서 반도체 전문 인력을 지속적으로 양성하면 됩니다. 사람, 기술, 설비, 현장 경험도 모두 갖춘 이런 교육시설이 일반 대학에서 최소한의 교원 수만 충족한 후 건물도 설비도 없는 상태에서 정원을 늘려 날림으로 교육하는 것보단 훨씬 효과적일 것입니다.
물론 반도체 설계나 공정기술 개발 등을 위해서는 반도체를 오랫동안 연구한 석박사급 연구원들이 필요합니다. 특히 한국 같은 경우는 뒤처져 있는 시스템 반도체 설계 분야를 끌어 올리기 위한 전문인력의 양성이 시급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대학원의 연구 활동에 지원을 강화하고, 대학원과 기업이 함께하는 프로젝트를 통해 관련 전문가를 키우면 될 일입니다. 반도체가 불황일 때 무차별적으로 정리해고 당한 후 지금은 외국의 반도체 회사에서 일하는 수많은 한국인 반도체 전문인력을 다시 끌어 들이는 것도, 아예 외국인 연구원들을 좋은 조건으로 스카우트하는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조금만 찾아보면 기업의 필요에 의해 교육을 흔드는 것보다 훨씬 좋은 방법들이 많습니다.
정부는 '반도체 관련 인재 양성방안' 보도자료에서 "이 방안 마련을 위해 정부부처와 전문기관이 참여하는 반도체 등 첨단 산업인재 양성 특별팀을 구성하여 반도체 인재 육성을 위한 정책 과제를 발굴하고, 산업계와 교육계 등 현장 의견을 폭넓게 수렴하였다"고 밝혔습니다.
그 "특별팀"의 첫 회의가 열린 게 지난 6월 15일이었습니다. 교육부 장관의 취임은 7월 5일이었습니다. "현장 의견을 폭넓게 수렴"한 후 '반도체 관련 인재 양성방안'이 발표된 건 7월 19일입니다. 손흥민의 드리블도 이보다 빠를 수 있을까 싶은 속도입니다. 지지율이 떨어지면 공무원들이 말을 잘 안 듣기 시작한다던데 이처럼 빠른 진행을 보니 대통령님의 발언이 아직은 장관들에게 먹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한 번만 더 이야기해 주시길 바랍니다. '현장 의견의 폭을 조금 더 넓게 수렴하고 충분히 고민한 다음 다시 보고 하라'고 말입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교육과 관련된 정책 아닙니까?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합니다.
이번 반도체 관련 인재 양성방안대로 하다가는 반도체 현장에는 별 도움 안 되면서 교육현장의 혼란만 불러오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반도체 현장에서 30년 이상 일하고 있는 엔지니어가 느끼는 날 것 그대로의 이야기입니다. 새정부의 공무원들이 한두 달 만에 급조해서 내놓은 보고서 보단 나을 거라 자신합니다. 숙고해 주시길 기대합니다.
[반도체 세 번째 특별과외] 대통령 지지율 올릴 뜻밖의 묘수
안녕하세요. 반도체에 관심이 많은 대통령께 반도체 공장 노동자가 해 드리는 반도체 특강 세번째 시간입니다.
첫번째 특강 (윤석열 대통령 발언에 경악... 이건 특별과외가 필요합니다 http://omn.kr/1zjg5)에서 반도체 공장의 환경오염과 인명사고에 대해 설명을 드렸는데, 정부는 반도체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늘리고 안전관련 규제를 푸는 걸 반도체 산업 지원 대책이라고 내놓더라고요. 두번째 특강 (윤 대통령, 또 틀렸다... '반도체 15만 양병설'은 헛발질 http://omn.kr/1zxnn)에서 반도체 인력이 부족한 진짜 이유와 15만 양성 같은 대책은 오히려 파국을 불러올 거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지난 2일 국무회의에서는 '대학 설립·운영 규정' 개정안을 심의·의결해 버렸습니다.
그렇게 알아듣기 쉽게 설명을 해드렸는데도 별무소용인 것 같아 안타깝기는 하지만 나무를 열 번 찍는 심정으로, 서당개 삼 년 가르치는 심정으로 특강을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정부 방침대로 반도체 인력을 15만 명이나 양성했는데 그들이 일할 곳이 없다면 큰 문제 아니겠습니까? 그들을 고용하려면 반도체를 생산하는 공장, 즉 팹을 지속적으로 지어야 할 겁니다. 그렇다면 그 팹은 어디에 짓는 게 좋을까요? 이것이 오늘의 주제입니다. 외국의 사례부터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외국의 반도체 팹은 어디에 있나
말레이시아 본토에서 비행기를 타고 두시간을 가면 보르네오섬이 나옵니다. 우리에게는 가구용 목재가 많이 나는 동남아의 정글 지역으로 알려져 있는 곳입니다. 이 섬 한 귀퉁이에 정글로 둘러 싸인 인구 60만의 작은 도시 쿠칭이 있습니다. 쿠칭은 현지말로 고양이라는 뜻입니다. 그 이름처럼 곳곳에서 고양이를 많이 볼 수 있으며 도시 입구에 커다란 고양이 조각상도 있습니다.
이 도시에는 고양이 말고 특별한 것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게 바로 반도체 팹입니다. 전 세계 4개국에 여섯 개의 팹을 운영하고 있는 독일 반도체 회사 XFAB의 말레이시아 팹이 이 곳 쿠칭에 있습니다. 200mm 웨이퍼를 한 달에 3만장 이상 생산하는 제법 큰 규모의 팹입니다. 직원의 대부분은 현지 말레이시아인이고, 연구원이나 일부 고숙련 엔지니어의 경우는 독일이나 프랑스에서 왔으며 한국 출신도 좀 있습니다.
이번에는 유럽으로 가 보겠습니다. 마피아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에도 팹이 하나 있습니다. 이 섬의 항구 도시 카타니아에 유럽 최대의 반도체 회사 STM이 팹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활화산으로 유명한 에트나 산을 등지고 있는 그 팹을 찾아 가다보면 출장을 가는 게 아니라 지중해의 어느 휴양지 섬으로 여행을 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반도체 팹이 외딴 곳에 지어져 있는 건 중국이나 일본도 비슷합니다. SK 하이닉스가 있는 우시는 상하이에서 차를 타고 세 시간 이상 가야 하는 곳이고, 삼성전자가 있는 시안은 중국 중남부 내륙에 있어서 비행기 말고는 가기 힘든 곳입니다. TSMC가 일본에 새로 팹을 짓겠다고 한 곳은 도쿄와 1천 km 더 떨어진 구마모토현입니다.
다른 나라의 팹들은 왜 이렇게 이른바 대도시와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걸까요?
팹을 지을 때 가장 먼저 고려하는 건 넓은 공장 부지, 안정적인 전기 공급, 그리고 공업용수의 공급과 폐수 처리의 가능 여부입니다. 주변에 공항이나 항구가 있어서 물류가 원활하면 더 좋습니다. 여기에 추가해야 할 결정적인 한가지는 환경오염 및 안전사고 발생의 가능성 때문에 인구 밀집 지역에서 멀수록 좋다는 겁니다.
팹에서 반도체를 만드는 과정에서 수십가지 유독 가스가 사용됩니다. 사용하고 난 가스는 1차, 2차 스크러버를 거치며 정화된 후 공장 굴뚝을 통해 배출됩니다. 팹 공장 굴뚝에서 한시도 멈추지 않고 뿜어져 나오는 연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첫번째 특강에서 소개해 드린 사례와 같이 유독 가스들이 기계 고장으로 인해 제대로 정화되지 않고 배출되는 사례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대기 중에 확산시켜서 농도를 낮추는 게 피해를 줄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가스 저장고에서의 누출사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외국의 반도체 회사들은 팹을 지을 곳으로 도심에서 떨어진 곳, 바닷가 또는 하천 주변의 소도시 가운데 개발이 덜 된 곳을 찾는 겁니다. 이미 공단이 조성된 곳에 자리 잡는 경우도 있구요.
수도권에 몰려 있는 한국의 반도체 공장
하지만 한국은 상황이 다릅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삼성전자 기흥이나 화성 팹도 한 번 가 보기 바랍니다. 가는 길에 보면 팹 바로 옆에 아파트 단지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걸 볼 수 있을 겁니다. 전 그 곳에 갈 때마다 삼성전자 팹에서만큼은 가스 누출 사고나 폭발 사고가 나지 않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원자력 발전소 근처에 세워진 아파트를 보는 기분이 들기 때문입니다.
향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새로 짓는 팹은 모두 수도권에 자리할 예정입니다. 삼성전자는 평택에 팹을 세 개째 짓고 있고, SK하이닉스는 용인에 반도체 클러스터를 만들어 팹을 지을 예정입니다. 이미 과밀화된 수도권에 팹을 지으려다 보니 지역민들의 토지를 수용해야 하고 그에 대한 보상을 위해 막대한 금액을 지불해야 합니다. SK 하이닉스가 용인에 세우려는 반도체 클러스터의 경우 계획 발표 후 3년이 지난 지금까지 토지수용도 채 마치지 못한 상태입니다.
땅을 확보한다고 해도 필요한 전기와 용수를 마련하는 다음 단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일단 반도체 팹은 전력 사용량이 어머어마한 수준입니다. 영국에 기반을 둔 국제 에너지 연구기관 엠버(EMBER)가 탄소배출이 많은 한국 기업의 전력 수요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2020년 한 해 SK하이닉스는 23.35TWh(테라와트시), 삼성전자는 22.92TWh를 사용했습니다. 태양광과 풍력 등 국내 재생에너지의 총생산량(21.4TWh)을 다 더해도 한 회사의 전력 사용량에도 못 미칩니다.
경기도의 전기 자급률은 60% 수준에 불과합니다. 경기도에서 쓸 나머지 전기를 다른 지역에서 끌어와야 한다는 겁니다. 민주당 신정훈 의원이 한국전력으로부터 제출 받은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비수도권에서 수도권으로 전기를 공급하는 '계통 인프라' 투자 비용은 지난 10년간 2조 3천억여 원에 이릅니다. 2012년 245억 원이던 것이 2018년에는 4440억 원으로 늘었는데 이 같은 급격한 증가는 2014년부터 본격화된 삼성전자 평택공장과 관련돼 있다는 것이 신 의원의 설명입니다.
전기는 발전소에서 멀수록 중간에 손실이 많아 실제로 받아쓰는 건 35%까지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 같은 계통 인프라 구축 비용과 손실비용은 전기 생산 원가에 포함되어 온 국민이 골고루 나눠 부담하게 되는 겁니다. 지금 상태로는 반도체 팹이 많아질수록 국민의 전기요금 부담이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팹의 물 사용량도 전기 못지 않습니다. 국내 공업용수 공급량 중 12.7% (44만 6000㎥. 2019년 기준)를 반도체 산업에서 소비합니다. 미국 오스틴의 삼성전자 팹이 수도관 동파로 멈춰선 적도 있었고, 대만에서는 겨울 가뭄으로 TSMC 팹에 물탱크 트럭을 동원해서 물을 공급하기도 했습니다. 물이 없으면 팹을 가동할 수 없습니다.
이 물을 수원지에서 공장까지 공급하는 과정이 쉽지 않습니다. SK하이닉스가 용인에 건설하려고 하는 반도체 클러스터의 경우 여주의 남한강물을 끌어와야 하는데 해당지역 주민들은 농업용수로 쓸 물을 빼앗기는 겁니다. 물을 공장까지 공급하기 위해 대형 파이프를 설치하는 과정에서 여주시는 도심을 파헤치는 공사로 불편을 겪어야 하지만 이로 인해 누릴 수 있는 혜택은 없습니다. 이런 일은 우선순위를 정하고 조율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정부는 반도체가 우선이라며 밀어붙이기만 하니 다툼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물을 끌어온다고 해도 사용하고 난 물은 또 버려야 합니다. 반도체 팹에서 사용하고 나오는 물이 하천이나 호수에 방류되면 그 곳은 문제가 없을까요? 첫 특강에서 소개한 것과 같이 미국 오스틴에 있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106일간 최대 288만 8000리터의 산성 폐수가 유출돼 인근 지류에서 물고기가 폐사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아직 1년도 안 된 일입니다. 미국에서 운영하고 있는 팹에서도 산성 폐수 유출이라는 사고가 나고 그걸 석 달이 넘도록 방치했는데 한국에서라고 그런 일이 없을 거라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대통령께서는 기업 입장이 아니라 국민의 입장에서 만에 하나 발생할지 모르는 사건 사고에 대처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수도권에만 팹을 짓는 기업들
공장부지확보, 전기와 물 공급 등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팹을 지을 곳으로 수도권을 고집합니다. "우수 인재 유치"를 위해 수도권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겁니다. 이미 조성된 반도체 클러스터를 벗어나면 협력업체를 통한 지원, 물류의 일원화 등 팹 운영의 효율이 떨어진다고도 합니다.
정부와 지자체는 이런 기업의 주장을 아무런 의심없이 받아들여서 수도권에 반도체 팹을 계속 건설할 수 있도록 각종 특혜와 예외 조항을 만들어 냅니다. 수도권 인구 집중과 과밀화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수도권 공장 총량제'는 제기능을 잃은 지 오랩니다. 반도체 회사의 이익 앞에 국토균형발전 같은 국가적 대의가 계속 무릎을 꿇어도 되는 걸까요?
지난 특강에서 반도체 팹에서 일하는 이들이 모두 반드시 석박사급 인재일 필요가 없다고 설명 드렸습니다. 반도체 회사를 새로 만드는 게 아니라 생산을 담당하는 팹을 짓는 것이기 때문에 고졸 오퍼레이터부터 전문대졸 장비기술 인력, 대졸 공정기술 인력이 필요한 인력의 대부분입니다. 팹을 어디에 짓든 거기서 직접 일할 인력은 대부분 그 지역에서 충당 가능합니다. 우수인재 유치를 위해 팹을 수도권에 지어야 한다는 건 허구입니다.
반도체 클러스터를 만들어 소재, 부품, 장비 회사와 협력하는 게 효율적이라 여길 수도 있습니다. 이것 역시 아닙니다. 반도체 팹은 하나 하나의 사업 규모가 워낙 커서 어디에 세우더라도 협력업체들은 기꺼이 따라갑니다. 팹 하나가 세워지면 그 지역 일대에 또 하나의 산업단지가 조성되는 겁니다. 보르네오섬, 시칠리아섬, 애리조나 사막, 아일랜드, 중국 내륙 도시 등 그 어디에 있는 팹도 외딴 곳에 있어서 협력업체의 지원을 받기가 힘들어 운영 못하겠단 이야기는 안 합니다.
반도체 팹을 지방으로 보내자
우수 인재 유치라는 말의 허구성도 말씀드렸고, 팹을 아무 데나 지어도 별 문제없다는 것도 말씀드렸으니 이제 우리나라에서 반도체 팹을 지을 가장 좋은 곳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곳은 바로 영호남의 원자력 발전소 인근 지역입니다.
발전소가 옆에 있으니 안정적인 전기 공급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온배수 방류를 위해 다들 바닷가에 있으니 팹에서 나오는 폐수가 하천과 호수를 거쳐 바다로 흘러가는 과정이 생략되어 만에 하나 있을 지 모르는 환경 오염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인구밀집 지역이 아닌 데다 주변이 아파트나 고층건물로 막혀 있지가 않아 가스 누출 등의 사고가 발생해도 대기 중 확산을 통해 농도를 낮출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원전 때문에 개발이 덜 된 곳이라 공장 부지 확보나 송수관 설치 등도 용이하고 산업단지 조성도 가능합니다.
원전 근처에 있는 팹에 누가 가려하겠냐는 말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원전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고, 대통령께서 먼저 나서서 원전이 안전하니 더 많이 운영해야 한다고 하셨잖습니까. 반도체 장비 중에도 방사능을 이용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대신 철저한 안전장치를 갖추고 사용합니다. 반도체 팹은 외부와 철저하게 단절된 클린룸에서 대부분의 일이 이뤄지기 때문에 원전 근처라고 해도 다른 공장에 비해 영향을 훨씬 덜 받을 겁니다. 원전 근처에 반도체 팹을 지으면 팹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원자력 발전소의 안전점검이 더 철저해지는 효과도 있을 겁니다.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팹 하나 건설할 때마다 언론들은 전문가의 분석이라며 수십조 원의 생산유발효과와 수십만의 고용창출효과가 있을 거라며 정부가 나서서 규제를 없애고 지원해 줘야 한다고 노래합니다. 그런 사회·경제적 효과를 이미 포화상태인 수도권이 아니라 이제껏 수도권에서 쓸 사람과 자원을 공급하느라 황폐화되어 버린 지방에 내려 보내자는 말입니다. 원전 때문에 손해만 보고 있는 지역에 이 정도 혜택을 줘도 되지 않겠습니까? 꼭 원전 옆이 아니어도 됩니다. 수도권 집중으로 인해 소외됐던 건 지방 어디든 다 마찬가지니까요. 거기는 풀어야 할 규제는 없고 지원은 진작에 필요했던 곳입니다.
회사의 반도체 팹을 모두 한군데 모아두었다가 만에 하나 자연재해나 대형 사고로 인해 모든 팹이 한꺼번에 영향을 받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예를 들어 삼성전자 팹이 모여 있는 기흥, 화성 단지에 단 하루만 정전이 발생해도 우리나라 경제가 흔들리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외국의 반도체 회사들이 팹을 여러 나라 여러 지역에 나눠서 짓는 건 그런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서입니다. 이 나라를 위해서도 기업을 위해서도 앞으로 지을 팹들은 기존의 팹이 있는 곳을 벗어나 지방으로 보내는 것이 옳습니다.
임기 시작 3개월만에 20%대로 떨어진 지지율 때문에 걱정이 많을 것으로 압니다. 반도체 클러스터를 포함해서 향후 건설할 팹을 지방으로 보내서 일자리를 만들어 주세요. 이왕 반도체 인력 양성을 위해 반도체 학과를 증설하기로 한 마당이니 팹이 들어설 지역의 대학교에 관련 학과를 늘리고 지원을 강화하면 지방대학의 경쟁력도 다시 살아날 겁니다. 젊은이들은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고, 수도권 인구집중으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 문제가 쉽게 해결될 겁니다. 온 나라가 고루 번영하는 그런 미래가 그려지지 않습니까? 반도체 인력 양성과 지역균형발전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은 대통령, 그럼 지지율도 회복할 수 있을 겁니다.
기업의 이익만 대변하는 전문가들 이야기만 듣고 설익은 정책을 뭔가에 쫓기듯이 밀어붙이는 모습이 아니라, 나라와 국민 전체에게 어떤 게 더 이익인지 고민하는 그런 대통령님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반도체 네 번째 특별과외] 반도체마저? 윤 대통령님, 이러다 나라 망가집니다 (https://omn.kr/235lv)
"300조 원에 달하는 대규모 민간 투자를 바탕으로 수도권에 세계 최대 규모의 신규 '첨단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를 구축하겠습니다." - 윤석열 대통령의 제14차 비상경제민생회의 모두 발언 중 일부.
안녕하세요. 대통령님이 반도체에 관심은 많은데 아는 건 별로 없는 것 같아서 기사를 통해 반도체에 대한 기본적인 것만 알려드린 게 작년의 일인데, 그 사이 과외를 좀 받은 것 같네요. 시스템반도체라는 걸 다 언급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발표한 내용을 보니 시스템반도체, 팹리스, 파운드리를 제대로 구분하지 않고 대충 뭉뚱거려 시스템반도체라고 한 것 같아서 오늘 추가 과외를 하려고 합니다. 알아듣기 쉽게 설명할 테니 긴장말고 편안하게 따라오세요.
메모리반도체 vs. 시스템반도체
우선 반도체의 기본적인 분류부터 설명하겠습니다. 예전부터 반도체는 크게 메모리반도체와 비메모리반도체로 나눠 왔습니다(이하 메모리와 비메모리). 메모리는 데이터 저장에 특화된 반도체로, 저장 방식에 따라 전원이 꺼지면 데이터도 날아가는 휘발성(DRAM 등) 및 데이터가 그대로 남아 있는 비휘발성(NAND Flash 등)으로 또 구분이 됩니다.
메모리는 일반적으로 대량으로 생산해 놓은 후 판매를 합니다. 그러다 보니 수요에 따라 가격변동이 큽니다. 코로나 시기에는 재고가 부족해 비싸게 팔았는데, 재고가 일 년치 가까이 쌓여 있는 지금은 가격이 절반 이하로 떨어져 업체들의 수익성이 크게 나빠진 상황입니다. 재고가 더 쌓이는 걸 막기 위해 일부 업체는 감산을 결정하기도 했습니다.
메모리는 한 회사가 설계와 생산을 함께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종류는 그리 많지 않은데 대량생산이 필수적이거든요. 이렇게 설계와 생산을 함께 하는 회사를 종합반도체(IDM)회사라고 합니다.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메모리반도체 세계 시장의 57%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마이크론, 일본의 키옥시아까지 더하면 메모리의 90% 이상을 한미일의 특정 반도체 회사가 공급하고 있습니다.
비메모리는 메모리를 뺀 나머지입니다. 반도체 시장의 30% 정도는 메모리, 나머지 70%는 비메모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비메모리 시장이 훨씬 더 큽니다.
비메모리는 크게 시스템반도체와 광・개별소자로 또 나눌 수도 있습니다. 연산이나 제어 등 정보처리 기능을 가지는 반도체를 시스템반도체라고 하는데 컴퓨터의 CPU, 휴대폰의 AP, 전기자동차에 들어 가는 온갖 반도체들이 모두 시스템반도체입니다. 카메라에 쓰이는 이미지 센서는 광・개별소자로 분류됩니다. 요즘은 이 둘을 묶어 그냥 시스템반도체라 부르기도 합니다. 비메모리반도체가 곧 시스템반도체라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다는 겁니다.
시스템반도체는 다품종 소량 생산이 일반적입니다. 그냥 쉽게 다품종이라고 말했지만 고객사가 요구하는 성능, 전력, 보안, 안전성 등의 기준에 따라 셀 수도 없이 많고 다양한 제품을 필요한 만큼 생산하는 게 시스템반도체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걸 한 회사가 다 설계하고 생산할 수 없어서 설계는 팹리스 회사가 하고 생산은 파운드리 회사가 하는 식으로 분업화되어 있습니다. 시스템반도체는 시장이 크고 제품도 다양한데다 수요자의 요구에 맞춰 제품을 생산하는 주문형 생산 방식이라 가격 변동이 그렇게 크지 않고 메모리반도체에 비해 시장도 안정적인 편입니다.
파운드리의 경우 대만의 TSMC가 50% 정도의 점유율로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고, 그 다음이 삼성전자인데 16% 정도 됩니다. 미국의 GF와 대만의 UMC를 더하면 세 나라의 네 회사가 전체 파운드리의 80% 정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메모리반도체도 그렇고 시스템반도체도 그렇고 한국, 미국, 일본, 대만 이 네 나라의 반도체 회사들이 세계 반도체 생산의 핵심인 것입니다. 한국의 반도체, 자랑해도 좋습니다.
그런데 시스템반도체의 설계를 담당하는 팹리스 쪽은 상황이 다릅니다. 팹리스 상위 열 개 회사를 보면 미국의 퀄컴과 엔비디아, 대만의 미디어텍, 중국의 하이실리콘 등 미국, 대만, 중국의 업체들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한국은 상위 50위로 확대를 해 봐야 겨우 LX세미콘(실리콘웍스) 하나가 포함되어 있을 뿐입니다.
앞에서 메모리반도체는 IDM이라 부르는 종합반도체 회사가, 시스템반도체는 팹리스와 파운드리가 분업해서 생산한다고 설명했습니다. 한국은 메모리반도체 분야에서는 세계 최고의 자리에 있고, 파운드리 역시 일정 수준의 위치에 올라와 있지만 시스템반도체의 핵심인 팹리스만 도무지 힘을 쓰지 못하고 있는 상태인 겁니다.
삼성전자의 시스템반도체 투자 발표는 재탕에 삼탕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의 현주소가 대충 이해가 되나요? 대통령님은 이번에 세계 최대규모의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를 만들겠다고 기염을 토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내용을 뜯어보면 시스템반도체의 핵심이자 우리나라가 가장 취약한 부분인 팹리스에 대한 지원책은 별로 보이지 않고 민간기업들이 이미 계획해 놓은 투자계획만 취합해 놓는 수준에 그치고 있습니다. 대규모 토목공사가 필요한 국가산단 만들겠다는 거 말고 또 뭐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산업통상부 담당자에게 확인해 보니 향후 5년간 투자한다는 340조원은 현재 건설 중인 삼성전자의 평택 반도체 팹처럼 기업들이 기존에 진행 중이거나 계획 중이던 시설 투자 및 R&D 투자들을 단순 취합해서 더한 금액일 뿐입니다. 게다가 이건 시스템반도체뿐만 아니라 반도체 전체 투자금액을 다 더한 겁니다.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 만든다는 300조원은 언론에 보도된 대로 2042년까지 (그 때 어떤 정부가 들어서 있을 지, 삼성의 회장은 바뀌지나 않았을지 모를 긴 시간이네요) 삼성전자가 짓겠다는 반도체 팹 다섯 개의 비용입니다. 10나노 이상의 최첨단 공정의 경우 팹 하나의 건설 비용을 대략 30조원 정도로 예상하는데 향후 20년에 걸친 장기 계획이다 보니 여유있게 300조원이라 발표한 겁니다. 이거 정부가 지어 주는 게 아니라 삼성전자가 투자할 금액을 정부가 발표한 것뿐입니다.
삼성전자가 300조원 투자해서 반도체 팹 다섯 개를 짓겠다는 발표를 왜 대통령님이 하는 지 전 이해가 잘 안 되네요. 그리고 삼성전자가 시스템반도체에 대규모 투자를 하겠다는 내용은 새로운 게 아닙니다.
삼성전자는 2019년 5월, 2030년까지 시스템 반도체 분야 연구개발(R&D)과 생산시설 확충에 133조원을 투자해서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도 세계 1위를 달성하겠다며 '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했습니다. 2년 후인 2021년 5월에는 기존 133조원에 38조원을 추가해 2030년까지 총 171조원을 투자하겠다고도 발표했습니다. 이번에는 300조니까 2년에 한 번씩 시스템 반도체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발표하면서 금액도 더해지고 기간도 늘어나고 있는 모양새네요.
삼성전자가 이렇게 시스템 반도체에 투자를 하는데, 아니 투자를 하겠다고 발표는 계속 하는데 아직까지는 특별한 성과가 보이지 않는 상황입니다. 시스템반도체를 주로 생산하는 파운드리 사업에서 삼성전자의 점유율은 2019년 1분기 19.1%에서 2022년 3분기 15.5%로 오히려 줄어들어 56.1%의 TSMC와의 격차는 더 벌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삼성전자의 시스템반도체 주력제품이던 모바일AP의 경우는 세계 시장 점유율이 2019년 12.0%에서 2022년 6%로 절반이 줄었습니다.
정부의 발표와 언론의 호들갑과 상관없이 앞으로 20년간 300조원을 들여 만들겠다는 삼성의 반도체 팹 다섯 개가 한국을 세계 시스템반도체 1위로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건조하게 말하자면 그냥 파운드리 생산 능력이 딱 그만큼 올라갈 뿐입니다. 파운드리는 팹리스업체들이 주문을 하지 않으면 생산할 게 없습니다. 한국에는 그 공장 다섯 개를 가동시킬만큼의 반도체를 주문할 팹리스업체는 없습니다.
애플, 엔비디아, 퀄컴 같은 팹리스 회사들이 반도체 생산을 해 줄 파운드리 파트너로 삼성전자 대신 TSMC를 선택하고 있는 건 삼성전자에 주문을 감당할 팹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TSMC가 삼성에 비해 공정의 안정성에서 앞서고, 자사 제품이 없어 고객과 경쟁하지 않으니 기술 유출에 대한 우려가 없기 때문에 다들 TSMC를 찾는 겁니다. 한국에 팹리스 업체가 많아지고 그 회사들이 삼성전자와 동등한 파트너 자격으로 거래를 할 수 있어야 비로소 한국의 시스템반도체가 세계 1위 자리를 넘볼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시스템반도체 지원한다면서 삼성전자만 지원?
한국의 시스템반도체를 메모리반도체처럼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 올리기 위해 정부의 지원이 필요한 분야는 파운드리 보다는 팹리스 쪽이라는 게 이해가 되나요? 이번에 정부가 발표한 "세계 최대 '첨단 시스템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관련 보도자료에 포함된 팹리스 관련 내용만 따로 찾아봤습니다.
"국내외 팹리스·소부장 선도기업 최대 150개 유치 및 우수인재 확보" 라든가, "디자인하우스-IP-파운드리 협력 강화", "2035년까지 유망분야(전력, AI 등) 지원으로 매출 1兆 스타팹리스 10개社 육성" 등의 항목은 딱히 뭘 하겠다는 게 보이지 않는 일종의 립서비스 같은 내용으로 읽힙니다. 전력, 차량, AI 등 3대 유망 반도체 R&D에 총 3.2조원 지원한다는 건 어떤 식으로 지원한다는 것도 없고, 팹리스 쪽으로 얼마나 가게 될 지 모르는 일이니 판단을 유보하겠습니다.
팹리스를 콕 집어 지원하는 항목은 "대기업-팹리스간 구매조건부 수요연계 프로젝트 지원(50~80억원/건)" 하나뿐입니다. 300조를 투자해서 세계 최대의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하겠다는 웅대한 발표 옆에 이걸 놓으니 초라해 보이는 건 느낌 탓일까요? 2019년 기준 국내 팹리스 기업의 총 매출은 약 15억 달러 규모로 추정됩니다. 정부의 이 지원책이 팹리스 업계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요? 간에 기별도 안 간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 아닐까요?
구체적인 대책이 안 보이니까 이번 정부의 발표에 언론만 신이 났을 뿐 팹리스 업체 관계자들은 코웃음을 치고 실망의 한숨만 내쉬는 겁니다. 한 팹리스 회사 대표는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출판사와 인쇄기만 마련해 놓으면 작가들이 좋은 작품 쓰느냐며 팹리스에 대한 지원 없이 파운드리 팹만 마냥 짓겠다는 이번 정부의 발표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습니다.
대통령님, 그거 아십니까? 대통령님이 뜬금없이 삼성의 300조원 규모 대규모 반도체 투자 계획을 대신 발표하던 날, 삼성은 300조원 팹에 대해서는 최대한 언급을 삼가는 대신 "지역균형발전을 위해 60.1조원을 투자하겠다"는 발표를 했습니다. 수도권에 공장부지를 이렇게 쉽게 확보하게 된 것에 대한 특혜 시비를 염려해 선제적으로 대응한 것으로 보입니다. 기사를 준비하는 지금까지도 삼성의 자잘한 소식들이 모두 올라오는 삼성 뉴스룸에는 60.1조원만 있고, 300조원 반도체 투자는 보이지 않습니다.
수도권 집중현상과 지방소멸 문제에는 눈 감은 채 수도권에 대규모 국가산단을 조성하고 대기업의 투자를 유치한다는 발표를 하는 중에도 "지방 균형 발전의 기조를 지방이 스스로 비교우위 분야를 선택하면 중앙정부는 이를 확실하게 지원하겠다"고 말하는 대통령님에 비해서 삼성전자는 최소한의 염치는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삼성 뉴스룸까지 압수수색 하지는 말구요.
이번 정부의 발표를 보면 시스템반도체 생태계나 팹리스를 위한 구체적인 지원책 대신 첨단산업 생태계 구축을 위해 국가산업단지를 조성한다는 핑계로 토건개발업자들의 오랜 숙원인 개발제한구역을 풀고, 수도권 공장 총량제를 무너뜨리고, 재벌 기업들을 대상으로 세액공제를 확대하겠다는 게 주목적인 것 같습니다. 300조원으로 세계 최대의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를 만든다는 걸로 바람을 잡고, 실상은 수도권에 대규모 국가산단을 개발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너무 표나게 그러니까 새롭기는 한데 나라 망가지는 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지 모르겠습니다.
진정 한국이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오르길 원한다면 온나라를 공사판으로 만들 국가산단 조성은 뒤로 미루고,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산업에 대한 지원방안을 다시 처음부터 검토해 주기를 바랍니다. 한가지 더, 이런 국가적 과제를 검토할 때는 검사 출신들은 좀 뒤로 물리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실제로 해당 분야에서 일하는 실무자들과 함께 하기를 권합니다. 공부 안 하고 급하게 발표한 게 너무 티나서 하는 말입니다. 다음에 또 뵙죠.
[반도체 다섯 번째 특별과외] 일본 소부장 업체 유치는 한국 소부장 산업에 대한 자해
소부장이라는 조어의 뜻은 이미 아시죠? 그래도 워낙 상식을 뛰어 넘는 분이니까 왜 소부장이라 부르는지부터 설명하겠습니다. 반도체 팹을 운영하기 위해 필요한 소재, 부품, 장비를 공급하는 업체에서 앞 글자만 따서 반도체 소부장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맨 앞에 '소'자가 들어가서 중소기업과 같은 느낌으로 이해하는 분들도 있는데 사실 초거대 산업군입니다.
반도체 소부장 업계의 현황
그럼 소부장 시장의 구조부터 알아볼까요? 반도체 장비의 경우 한국, 중국, 대만 이 세 나라가 전체 반도체 장비의 80% 가까이를 구매하고 있습니다. 그럼 장비를 파는 나라는 어디일까요? 미국이 독보적인 1위이며 그 뒤를 네덜란드와 일본이 따르고 있습니다. 이 세 나라가 장비 판매의 85% 이상을 차지합니다.
반도체 소재의 경우 40% 이상을 일본 회사가 공급하고 있습니다. 품목별로는 일본 기업이 실리콘 웨이퍼의 약 60%, 포토마스크나 포토레시즈트 70% 이상이며, 일부 특정 소재의 경우는 90% 이상을 독점 판매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처럼 반도체 산업은 실질적으로 특정 국가의 초거대 기업 몇 개가 전체 생태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한국은 세계에서 메모리 반도체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나라이며, 파운드리 역시 삼성전자가 TSMC 다음으로 두번째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반도체 장비와 소재를 가장 많이 수입하는 세 나라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이 상황에서 장비와 소재를 국산화한다면 한국 반도체가 국가 경제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국산화는 전공정 장비 중에서도 진입장벽이 상대적으로 낮은 세정과 식각, 증착 공정에서 우리 소부장 업체들의 기술력이 해외 선도기업 대비 90% 정도로 높게 평가 받고 있습니다. 때문에 해당 공정의 장비와 소재의 국산화율이 상대적으로 높습니다. 특히 가스와 케미컬의 경우에는 공급 안정성 확보와 물류비용 절감 차원에서 빠른 국산화가 이뤄졌습니다.
그에 반해 노광과 이온주입 공정은 기술력이 10~20% 수준이라 아직도 거의 대부분 외산 장비와 소재를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일부 소재의 경우는 일본이 독과점 공급하는 것들이 있어서 국산화 혹은 공급선 다변화가 시급합니다. 실제로 일본 정부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 이후 빠르게 국산화가 이뤄지고 있기도 합니다.
한국으로의 진출은 외국 소부장 업체들의 바람
한국에서 국산화가 많이 진행된다는 건 외국의 반도체 소부장 업체 입장에서는 시장을 잃는 게 됩니다. 그래서 세계 유수의 반도체 소부장 업체들은 한국에 생산공장을 짓거나 연구센터를 운영하는 식으로 한국 진출에 적극적입니다.
연 매출 28조원의 글로벌 1위 반도체 장비 업체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는 지난 해 7월, 한국에 연구개발(R&D) 센터를 짓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차세대 장비 개발 단계부터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와 협력하겠다는 의도입니다.
미국 램리서치는 2011년부터 이미 한국에 생산법인을 세워서 국내에서 반도체 장비를 생산 중이고, 도쿄 일렉트론은 2012년 경기도 화성에 R&D 센터를 설립했고, ASML도 2025년까지 화성에 신사옥을 짓고 장비 수리센터 및 교육시설 등을 짓겠다고 발표했으니 세계 반도체 시장의 70%를 차지하는 거대 반도체 장비 회사 네 개 모두 한국에 생산 혹은 연구 시설을 가지게 되는 겁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포토레지스트 세계 시장점유율 1위 업체인 일본의 도쿄오카공업은 한국 인천에 있는 기존 공장의 생산능력을 2018년의 2배로 늘렸습니다. 반도체 제조용 가스를 생산하는 다이킨공업도 한국에서 제조 공정용 가스 공장을 신설했습니다. 일본의 신에쓰화학공업은 대만에서 포토레지스트를 제조하는 새 공장을 가동해서 한국으로 수출하기로 했습니다.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 이후 3년, 한국에선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솔브레인과 SK머티리얼즈가 초고순도 불화수소 가스를, 동진쎄미켐은 포토레지스트와 불화아르곤 국산화에 성공했습니다. 국산화가 진행되는 동안 미국, 대만, 중국 등으로 수입선을 다변화하기도 했고, 미국의 소재회사들이 한국에 생산 시설을 늘리기도 했습니다.
한국무역협회가 발표한 2018년 대비 2022년 3대 수출규제 품목의 일본 의존도는 포토레지스트가 93.2%에서 77.4%로, 불화수소는 41.9%에서 7.7%로, 불화폴리이미드는 44.7%에서 33.3%로 떨어졌습니다. 일본의 자해로 한국의 소재 국산화와 수입선 다변화가 이뤄진 것입니다.
일본 소부장 업체들을 대거 유치하겠다는 대통령의 자해
그래서입니다. 대통령께서 지난 21일 국무회의에서 "한일관계는 한 쪽이 더 얻으면 다른 쪽이 그만큼 더 잃는 제로섬 관계가 아니다"라며 "용인에 조성될 예정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일본의 기술력 있는 반도체 소부장 업체들을 대거 유치함으로써 세계 최고의 반도체 첨단 혁신기지를" 이루겠다고 한 말에 제가 경악하는 것 말입니다.
일본의 반도체 소부장 업체들은 일본 정부가 수출을 막으면 우회로를 뚫어서라도 한국 반도체 회사에 납품을 해야 살아 남을 수 있습니다. 한국, 중국, 대만이 세계 반도체 생산을 도맡아 하는 가운데 미중 갈등으로 인해 중국으로의 소재 수출이 줄어들면 일본 소재 업체로서는 한국과 대만 말고는 선택지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왜 굳이 우리가 먼저 혜택을 주면서까지 일본에 손을 내미는 겁니까?
대통령님이 일본 소부장 업체더러 용인반도체 클러스터 마련해 놨으니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하면 일본에서는 어떤 회사가 손을 들고 올까요? 가스나 케미컬 업체들이 가장 먼저 들어 올 가능성이 큽니다. 가스나 케미컬 같은 경우는 그 자체가 위험하기도 하지만 운송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있을 지 모르는 거라 생산 공장이 반도체 팹과 가까이 있을수록 좋거든요.
한일 반도체 소부장 분야만 본다면 "한 쪽이 더 얻으면 다른 쪽이 그만큼 더 잃는 제로섬 관계가" 맞습니다.
같은 성능을 낸다면 애국심 때문이 아니더라도 우리나라 장비와 소재를 쓰는 게 여러가지로 유리합니다. 사실 성능이 좀 부족해도 다른 장점으로 극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팹 바로 옆에 일본 장비회사와 소재회사가 들어와 있으면 우리 반도체 소부장 업체들의 경쟁력 하나를 잃게 되는 겁니다. 일본 반도체가 우리보다 역사가 오래 돼서 우수한 부분이 더 있을 수 있습니다. 그걸 지리적 이점으로 상쇄해서 경쟁하고 있는데 그마저도 일본 업체에게 유리하게 해 주겠다고 하니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산업부에 따르면 우리나라 반도체 소부장 자립화 비율은 30%입니다. 그래서 지난 해 7월, 산업부 장관이 직접 동진쎄미켐 발안공장을 찾아 가서 '반도체 초강대국 달성 전략'을 발표한 거 아닌가요? 산업부 장관은 그 자리에서 2030년까지 우리나라 소부장 자립화 비율을 50%까지 높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요즘 대통령님과 여러 장관 사이에 서로 말이 안 맞는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지만 그래도 국가 주요산업에 대한 입장이 이렇게 다르면 안 되는 겁니다.
대통령님의 반도체 정책에 조언을 하는 어느 교수는 일본 반도체 소부장 업체를 한국에 유치하는 걸 두고 남들은 친일이라지만 자신은 일본을 이용하자는 '용일'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더군요.
기가 막힌 말장난이지만 그래도 백번 양보해서 용일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한국에 진출할 일본의 소부장 업체는 전 세계 점유율 최상위 업체로 자격 제한을 하고, 한국에 공장을 세운 후에는 직원의 일정 수준 이상을 한국인으로 채용하도록 하는 겁니다. 수익의 일부는 반드시 한국에 재투자하도록 조건을 걸구요. 공장 부지는 지역균형 발전을 위해 용인 클러스터가 아니라 지방의 국가산단에만 입주하도록 제한을 걸어야 합니다. 이 정도는 해야 용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 조성할 용인 클러스터에 일본 업체를 각종 혜택을 주며 유치하는 건 그냥 친일입니다.
"이제는 일본을 당당하고 자신있게 대해야 합니다. 세계로 뻗어나가 최고의 기술과 경제력을 발산하고, 우리의 디지털 역량과 문화 소프트 파워를 뽐내며, 일본과도 협력하고 선의의 경쟁을 펴야 합니다."
맞습니다. 일본에게 당당해야 합니다. "선제적으로 걸림돌을 제거"한다면서 일본이 원하는 건 다 들어주고, 일본은 생각조차 않는 "호응"을 구걸하는 건 당당한 게 아니라 비굴한 겁니다. 국제사회에서 상대에게 당당하려면 우리의 힘을 먼저 길러야 합니다. 우리의 힘은 우리나라 기업들의 힘에서 나오는 겁니다. 일본 소부장 업체가 아니라 우리나라 소부장 업체의 상황을 먼저 살펴야 한다는 말입니다.
강의를 마치기 전에 한가지 부탁을 드리려고 합니다. 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대통령님을 위한 저의 반도체 강의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그래서 대통령님이 반도체에 대해서 최소한의 기초상식을 갖출 수 있을 때까지 만이라도 반도체 관련 정책에 대해 일체 관여를 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아직은 대통령님이 가만히 있는 게 되레 도와주는 것 같습니다. 이 어려운 경제상황 속에서도 그나마 수출로 외화를 벌어들이고, 수입을 대체하여 외화를 절약하고 있는 우리의 반도체 소부장 업체들을 대신해서 드리는 부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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