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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자본주의, 공산당과 월가의 오랜친구관계

SaintShin 2022. 10. 24. 20:40

2021.9월 게제했던 글...

 
2020.10.24일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 알리바바 그룹의 창립자이자 ‘재물신’으로 불리는 마윈(馬雲)
상하이 금융 Summit에서  "중국의 금융 시스템은 다른 개발도상국 수준에 그쳐 있다"며  "과거의 방식으로는 미래를 관리할 수 없다. 중국 금융권은 전당포 식의 낡은 사고방식을 버리고 신용체계를 기반으로 하는 발전되고 건강한 금융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며 중국 당국의 금융 시스템을 노골적으로 비판한 후, 

11.02일 마윈은 인민은행과 증권감독관리위원회 등 4개 감독기관과 예정 면담을 하게 되었다.
사실상 중국 규제당국과의 면담은 당국의 '군기 잡기'와 질책을 위한 자리인 것이다.


11.05일 세계 최대 규모의 앤트그룹의 345억달러(약 39조1000억원) 규모의 IPO(상장)을 앞두고 있던 시점에서의 면담으로 이후 상장은 무산되고 앤트그룹 일부 -엔트파이넨셜- 가 국유화되어 중국중앙기업이 되었으며 엔트파이넨셜은 기존에 해왔던 예금과 자금관리업무를 배제했다. 

 
마윈은 예정면담 이후 갑자기 예정되었던 TV 쇼 ‘아프리카 기업 영웅’의 마지막 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미 경제매체인 야후파이낸스는 실종설까지 제기되었는데  혹자는 구금설도 있었으며 3개월후에야 모습을 드러내며 중국 공산당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했다.
 
이 사례가 한때 중국의 대학생들 중 90여 %가 공무원과 사업자 중 스타트업을 희망할 정도로 마윈의 영향력이 컸는데 공산당에 협조하지 않으면 그 어떤 자본도 중국에선 성공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중국 국영기업의 등급. 중앙기업의 이사는 장차관급임

 
중국의 자본가는 어떻게 커 왔을까 ?
 
1949년 3년동안 이어진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한 후,
마오쩌둥(Mao Zedong, 毛澤東)은 그해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며 15년내 미국을 때려잡자는 모토로 국민을 총동원한 대약진운동을 전개했다. 동시에 중국의 경제적 어려움을 타파하기 위해 "지금 우리는 자본가와 단결해야 한다"고 발언하며 개인자본과 경영군을 빼앗지 않겠다고 하며 자본가의 도움을 요청했다.
 - 중국 5성 홍기 중 2개는 자본가 의미 (공인계급, 농민계급, 소자본계급, 민족자본계급, 가장 큰 별이 공산당)

 

마오쩌뚱; "지금 우리는 자본가와 단결해야 한다"고 발언하고 있다.

 
이때 많은 재산가들은 대만과 홍콩으로 탈출을 했는데, 장쑤성 우시의 토착재벌이자 양쯔강 이남의 최대 밀가루와 방직공장을 가진 룽이런(榮毅仁, 병음: Rong Yiren, 1916년  5월 1일 ~ 2005년 10월 26일)이 적극적으로 공산혁명을 지지하면서 소위 공산당과 끈끈한 붉은 자본가(紅色資本家)의 탄생 시초가 되었다.
 
1949년 공산당은 사회주의국가로 전환되면서 사유재산을 국유화하기 시작했고 이때 많은 자본가들은 그들의 기업을 정부에 액면가보다 낮은 가격에 팔아넘겼다.
이때 룽이런은 선제적으로 방직공장을 국가에 기부하는 민첩함을 보이며 마우쩌뚱으로부터 "민족자본가의 표본, 세계적인 중국 재벌은 룽씨 가문뿐"이라며 칭찬하며 1957년 상하이 부시장까지 역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1966년 사회주의경제로의 급속한 전환이 큰 후유증을 잃자 정권의 핵심에서 물러났던 마오쩌뚱이 민중과 학생을 선동해 강력한 사회주의계급투쟁을 선언하며 문화대혁명 발발했다.  자본가, 지식인들은 인민의 적으로 간주되어 홍위병들에게 잡혀  공개처벌 되었는데 이때 룽이런도 머리를 반삭발 당하는 모멸을 당했다.
 
이때까지 마오쩌뚱의 경제정책의 실패로 중국국민들은 배고픔을 감수해야했으며 5000만명 이상이 굶어 죽는 등  세계 최빈국으로까지 전락되었다.
자신이 신봉하는 이념을 위해서, 또는 권력을 유지하려고 인간을 서슴없이 도구로 사용하고 어떠한 인명손실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냉혹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신념과 절대권력을 유지하려 한 욕구 때문에 수천만 명이 굶어 죽거나 맞아 죽고, 나머지는 하루 한 끼로 연명하는 극빈층으로 전락하는 등 중국의 문명은 일시에 후퇴하였다.
 
1976년 마오쩌뚱이 서거하고 문화혁명이 막을 내린 후,
덩샤오핑(Deng Xiaoping, 鄧小平, 1903~1997)이 집권하면서 자본주의보다 우월한 사회주의를 만들려면 먼저 가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하며 개혁개방을 위해 룽이런을 재기용하였다. 룽이런은 덩샤오핑의 전적인 권한을 위임받아 외국자본과 선진기술 유치를 위해 중국국제신탁투자공사(CITIC)를 탄생시켰다.  그는 국가부주석까지 역임했다.
 
1980년대 이후 중국엔 다양한 자본가가 탄생하기 시작했다.   이때 조금씩 중국 인민들이 배고픔을 잊게되기 시작한 때이다.  참고로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음식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1981~1990년 중국경제 평균성장률은 9.3나 되었다, (IMF 집계)
 

덩샤오핑 시대에 민주화 요구가 강해지며  발생된 천안문 사태 이후 집권한 장쩌민(江泽民)은 당서기와 군권을 이수받아 3개 대표이론을 주창하며 기업가와 자본가의 공산당 입당을 허가..
공산당의 손을 잡은 자본가는 정부의 무제한적 금융지원과 값싼 노동력, 13억 인구의 막대한 시장이라는 잇점을 누리며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는데  
2015년 자산기준으로  1위 농부산천 종샨샨 67조, 2위  Tencent 마화텅 64조, 3위 알리바바 마위 57조, 헝루이의약 순파오양 40조, 메이디그룹 허샹젠 34조 등이 등극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한 공룡기업이 일부 권력과 일부 자본가에게 집중되었다.

 

 
중국의 억만장자가 늘어나며 국가의 GDP도 크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중국내 100대 기업은 대부분이 세계 500대 기업에 포함되어 있다.

한국내 한 중국전문가 말에 의하면 장쩌민의 20년 집권시기에  합리적인 통계에 의존하지 않은 무분별한 과잉투자와 과잉저가생산으로 인한 엄청난 저가 수출 등이 중국의 경제는 물론이고 전 세계 경제의 붕괴를 낳았다고 한다.
 
심지어 후임자인 후진타오에게 실질적인 자본과 권력의 셰력을 온전히 위양하지 않고 자신이 더 휘둘렀다고 .....
 

 

중국의 권력투쟁에서 보는 권력 계보도

 
 

중국 공산당과 미국 Wall Street는 오랜친구 (老朋友, Lǎo péngyǒu)

 
중국 공산당과 미국 월가는 1900년대 중반부터 서로의 이익을 위해 공존해온 관계라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이다.
 
1940년대 마오쩌뚱은 미국 외교관들과 3년 동안 지속적인 미팅을 하며 상호 협력관계를 모색했으며, 특히 미국 외교관들은 공산당 본거지인 산시성 옌안에 3년간 머물며 중국 공산당의 생각과 향후 전개방향에 대해 관찰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며 미국이 유엔에서 중국과 북한을 주적으로 몰며 밀월관계는 끝나고,
1972년 닉슨대통령이 부임하고 나서야 마오쩌뚱과 미중 경제협력을 논의하게 되었다.
1979엔 뎡샤오핑이 집권 후 바로 미국을 방문하여 미국의 경제시스템을 중국에 대입하기 위한 노력을 하였는데,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모기지론과 뱅크런, 리먼브라더스 파산에 의한 전세계의 금융위기를 겪으며 중국의 경제마저 어렵게 되자 중국 공산당은 서구사회 지본주의 경제체제에 큰 의구심을 가지며 철저한 계획경제로의 전환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중국은 무려 750여조원을 국내 경제부양책에 쏟아 부으며 미국으로부터도 칭송을 받게 되는데 
이때 과거 월가 특히 글로먼삭스로부터 경제적 자문을 받았던 왕치산이 역으로 미국이 중국의 경제 도움을 받아야 할 거라고 한다.

 
이때부터 중국은 자신감을 갖게 되고 국조(궈차오, 중국상품애용) 사상이 젊은 층에게 뿌리내리게 되었다.
2020년 후반기엔 코로나로 인해 미국과 유럽의 생산성 저하를 중국이 수출로 상당 부분 메꿔주며 - 중국의 GDP중 30% -  한편 중국내 부동산투자가 늘면서 중국 경제가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였다.
그러나 2021년 들어서며 주택자금 대출을 제한하며 긴축에 들어갔다.

 
미국은 트럼프 집권 후, 중국의 값싼 제품 수입으로 인해 제조업이 붕괴되고 실업자가 증가하며 미국경제가 붕괴위기에 놓이자 중국은 도둑이라며 무역전쟁을 선포하게 된다.
 
이에 중국은 류허 (시진핑의 경제 책사, 중국재경영도소조 주임)을 미국에 파견하여 월가의 거물들 (골드만 삭스 CEO, JP모건 회장, 블랙록 CEO 등)과 은밀한 미팅을 전개하며 무역전쟁을 피하기 위한 논의를 했다.
 
여전히 바이든 정부도 중국을 적대시하고 경계하고 있으나  전문가들은 중국 공산당과 미국 월가의 긴밀한 관계는 상호 이익을 위해 오랜 친구 (老朋友, Lǎo péngyǒu)이자 Frienemy (적이면서 친구) 관계를 이어갈 거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