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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평독후감- 조선 몰락은 국제정세에 무지했던 지도층 책임이라는데

SaintShin 2022. 10. 21. 21:44

일찌기 일본소설 <도꾸가와 이에야스, 德川家康-한국엔 大望이란 제목으로 인기를 끌었었다>과 <쇼오군> <미야모도 무사시> <무사도> 등을 읽으며 중세 일본의 역사와 그 들의 도전과 응전에 대한 역사를 조금이나마 이해를 하면서 왜 같은 시기에 우리 나라는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 라는 의문과 자조에 또 조금은 몇몇 옛 위정자들의 무지와 자기 보신을 탓한적도 있었다.  

 

하물며 작금에 들어서도 우리나라의 정치, 사회, 경제 각 분야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참 한심한 것들이 한 둘이 아니다. 매일 같이 정치권의 이합집산과 하마평을 보고 있자면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하고 교육현실을 보면 벌써 10년 넘게 문제가 되고 있는 인성교육이냐 주입식 교육을 통한 입시전쟁이냐 등의 이슈들이 개선의 기미는 보이지 않은 채 마치 전교조와 비전교조파들의 힘겨루기 처럼 진행이 되는 거 같고, 사회는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는 거 같고......

도대체 언제 이 나라의 지성인들이 제대로 된 나라를 일구어 내자고 목소리를 높이고 존중받고 함께 힘을 모아 신세계를 ㅁ나들어 나갈 지 ....

 

 마침 오늘 읽은 기사에 보니 전 외교부장관이던 분이 그와 관련된 글을 기재하여 공감이 가는 부분이 있어 이 곳에 옮겼다.

 

공로명 세종재단 이사장 "한국史 진솔한 성찰 할 때 됐다"

"100년 전 한 나라는 왜 신흥 근대국가로 흥륭(興隆)의 길을 걸었고, 다른 한 나라는 열강에 의해 골칫거리로 생각돼 피식민지배의 나락으로 떨어졌는지 진솔한 성찰을 할 때가 됐다. 우리의 민족감정이 일제의 비(非)도덕성을 용납할 수 없는 것과 같이 당시의 우리 역사에 대한 가감 없는 반성이 있어야 한다."

1990년대 외무장관을 지낸 공로명(78·사진) 세종재단 이사장이 식민지배를 초래한 100년 전 한국 역사에 대한 성찰을 촉구하고 나섰다.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정재정)이 4일 독도연구소 개소 2주년을 맞아 서울 대한상공회의소에서 개최하는 '근대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한반도 100년: 성찰과 전망' 국제학술회의 기조강연에서다. 공 이사장은 미리 배포한 발표문 '조선의 몰락과 정치 지도력'에서 국권상실의 원인으로 지배층의 분열과 국제 정세에 대한 무지를 꼽았다.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를 만난 적이 있다. 1000년 로마 멸망의 원인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서슴지 않고 로마 지배층의 내부분열이라고 답했다. 우리 역사에서도 고구려가 연개소문 아들끼리의 불화로 쉽게 멸망했던 고사(故事)가 있다. 가깝게는 구한 말 대원군과 명성황후 간의 내분이 조선의 사양화에 불을 질렀다고 하겠다."

공 이사장은 조선 지배층의 시대 변화에 대한 무감각이 병합을 초래했다고 비판한다. 일본 지도층이 세계 각국의 정세를 소개한 위원(魏源)의 '해국도지'(海國圖志)를 앞다퉈 읽으면서 부국강병과 개화에 앞장선 데 반해, 조선의 지도층이 이 책을 읽고 위기의식을 가졌다는 얘기는 못 들었다는 것이다.

서양 세력과 본격적으로 맞닥뜨리고도 한·일 두 나라의 대응은 달랐다. 일본은 막부 말기 영국·프랑스·네덜란드·미국 함대와 전쟁을 치른 뒤, 서양을 배척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개국으로 나선 데 반해, 조선의 대원군은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971)를 치르고도, 쇄국 정책을 고집했다. 공 이사장은 "외세에 둔감했고, 구습에 젖어 있던 우리의 선인들은 그 대가를 자주권의 실권으로 치르게 됐다"고 했다. 주일(駐日)·주러시아 대사를 거친 공 이사장은 한국의 대표적 직업 외교관으로 손꼽히는 외교통이다. 

 

유튜브 중 김용삼님 특강 <150년전 고종과 21세게 문재인대통령은 완전히 닮은 꼴> 중, 그는 조선 고종 때 상황이 외세에 의존하려는 타성과 청나라, 일본 등 열강들의 간첩들이 왕실에 드글거렸던 상황이었다고 말한다.

 

고종이 왕권 강화를 위해 청나라로 벗어나기 위해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미국 입장에서 조선은 착취할 것 조차 없던 가난한 나라였기에 관심이 없었다. 

당시 영국과 러시아의 견제와 대립은 현재 미국과 중국의 견제와 대립과 흡사하다.

 

스스로 강해야 산다.

 

신문기사를 읽으며 새삼 느낀 게 있어 글을 적는다.

 

금년이 한일 합병 100년이 되는 해다. 그리고 36년간의 식민지 지배로 인해 많은 한국민들이 희생 당하고 많은 걸 잃었다.

물론 합병이 되기 전까지 우리 것만 고수하고 철저히 외국과 이문화를 배척했던 당시의 무지했던 왕가와 고관대작들의 행태와 닫힌 마음때문에 합병이 안되었더라면 한국이 어떤 나라로 남았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쨋든 열강의 움직임에 둔했던 우리,  그래서 스스로 힘을 기르지 못하고 제대로 대항하지 못했던 우리,

대원군과 민비의 정치적 소신으로 빚어진 알력 등....이런 게 한 나라를 국민을 희생시켰던 것이다.

 

부국강병....

예나 지금이나 스스로의 힘과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

그래야 무한 경쟁 시대에 살아남고 자기의 뜻대로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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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스 1910년 8월 22일자 제목

 

미국과 영국 등 서구 언론들은 한·일 강제병합 조약 체결 전부터 일제의 한국병합 사실을 타전하고 있었다.

뉴욕타임스는 1910년 8월 18일자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다(JAPAN IS ABOUT TO ANNEX KOREA)'라는 제목의 도쿄발(發) 기사에서 "오래전부터 예견되던 일본의 한국 병합이 곧 실현될 것으로 보인다"며 "한국의 독립은 이미 1905년 11월 17일 일본과 맺은 조약(을사늑약) 때 실질적으로 종식됐다"고 보도했다.

 

▲ &nbsp;일제의 한국 강제병합을 보도한 뉴욕타임스 1910년 8월 22일자. &lsquo;나라로서의 한국은 이번 주 사라진다&rsquo;는 큰 제목과 &lsquo;어떤 소요도 예상되지 않는다&rsquo; &lsquo;철저한 경찰 통제 때문에 한국인들은 현재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전혀 모른다&rsquo;는 소제목들이 달렸다.

 

뉴욕타임스는 이어 8월 20일자에 "한국 전역은 일본의 강력한 군사적 감시하에 있으며, 수많은 일본 군함이 한국 해안을 순찰하고 있다"면서 "일본은 공식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으나 여러 정황들을 볼 때 병합은 임박했다"고 썼다. 8월 22일자에는 '나라로서의 한국은 이번 주에 사라진다(KOREA AS A NATION TO END THIS WEEK)'라는 제목 아래 "일주일 내에 '은둔의 왕국' 대한제국(Empire of Korea)은 역사적 용어가 되고, 1200만 인구는 일본에 더해지며, 잉글랜드만 한 크기의 영토는 일본제국의 한 부분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이후 '한국은 이제 일본'(23일), '일본, 한국병합 공포한다'(25일) 등 연일 한·일 강제병합 소식을 전했다.

영국 유력지 더타임스도 8월 25일 "일본의 한국병합이 언제든 실현되리라는 것은 이미 예견되어 왔으며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면서 "대영제국은 영·일동맹에 따라 일본이 한국에서 우월한(paramount) 정치·군사·경제적 이익을 갖는다는 것을 인정했었다"고 보도했다. 더타임스의 관심은 한국이 아니라 한국에서 영국의 경제적 이익에 관한 것이었다. 8월 27일자 더타임스의 '편집자에게' 코너에 '일본과 한국'이란 글을 실은 독자는 "일본은 상업 및 산업에서 모든 나라에 동등한 기회 원칙을 약속했는데 이것이 제대로 실행되어야 한다"고 썼다.

 

필립 토우 英케임브리지대 교수   (케임브리지(영국)=김기철 기자 kichul@chosun.com)

"100년 전 한국은 지금의 아프가니스탄과 비슷한 처지였다. 약하고 불안정한 국가는 외부 세력의 개입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필립 토우(Towle)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19세기 말 조선의 쇠약이 영·일동맹과 일본의 조선 지배를 가져왔다고 지목했다. 로이터통신 기자를 거쳐 영국 외무성에서 4년간 일했던 토우 교수는 현장을 아는 국제정치학자로 통한다.

―영국은 왜 영·일동맹으로 조선에서 일본의 특수한 지위를 승인했는가.
"당시 영국은 조선을 돌아본 여행가와 언론인들이 조선에 관한 정보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을 국력이 약하고 불안정한 나라로 소개했다."

 

―세계를 제패한 영국이 일본을 동맹국으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19세기 말부터 러시아와 미국·프랑스·일본의 해군력이 증강되면서 영국 해군의 우월적 지위를 위협했다. 러시아는 영국의 발명품인 철도를 시베리아에 부설해서 만주에 군대와 물자를 실어나르고 있었다.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고 동아시아의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과 손을 잡았다."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서라고 했는데, 영국은 1907년 러시아와 협정을 맺고 화해하지 않는가.
"한국은 단기간의 외교 게임에서 희생된 측면이 있다." 

 

―100년 전 한국이 러시아에 기댄 게 잘못인가.
"러시아가 아니라 다른 나라에 의존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고종은 좀 더 일찍 강력한 군대를 만들어야 했다. 일본에 어느 정도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했다."

 

―100년 전 영·일동맹에서 한국이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인가.
"열강이 한국의 독립보다 자국의 이익을 앞세운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자기 나라를 지킬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갖고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