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대통령과 추종자들이 쏘아 올린 뉴라이트와 건국절 논란
참기 어려운 국가 정체성 붕괴 언행을 삼가하길........
정부의 잘못된 결정과 광복절 기념행사에 광복회 등의 불참은 불합리에 대한 합당한 저항이다....
나도 과거 역사에 몰입해 현재의 일본을 배척하진 않는다.. 다만 역사까지 부정하지 않을 뿐
유대인들 독일은 홀로코스트에 대해 "용서한다, 그러나 잊지 않는다." 정신과 의지 필요....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인선을 둘러싼 이념 갈등이 이어지면서 광복회 등 일부 단체는 정부가 주최한 경축식에 처음으로 불참하는 대신 자체 기념식을 열었다.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야당도 경축식을 보이콧했다.
김 내정자는 일전에 모 강연회에서 일제시대 조선인들의 국적은 일본이라고 했으며, 1919년 상해 임시정부수립을 건국으로 보는 건 이치에 맞지 않다고 했다.
이에 정부, 여당과 야당, 재야단체간 상호간의 날선 비판과 공격이 연일 계속 되고 있고, 일부 티비 채널에선 패널간 논쟁이 끊이질 않고 있다.
국민의힘 신지호 전략기획부총장은 YTN <시사정각>에 출연해 "이종찬 광복회장은 1919년이 건국이라고 주장하는데, 이에 따르면 1910년 한일합병이 이뤄졌으니 일제강점기가 36년에서 4분의 1토막 내서 9년이 된다"며 "이 회장이야말로 일본 극우의 기쁨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하며, 논란이 커지자 신 부총장은 "표현이 과했음을 인정하고 사과하니, 이 의원은 경축식에 참석하시기 바란다"면서도 "1919년 건국 주장은 일본 극우가 환호작약할 논리라는 점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쓴 표현이며 이 주장은 유지한다"고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김진태 강원도지사는 전날 강원도 광복절 경축 행사에서 '국가가 되려면 국민, 영토, 주권이 있어야 하는데 1919년은 주권이 없었다"며 1948년에 건국되었다고 발표했는데 웬 바보같은 말인가 ?
우린 당시 주권을 뺴앗긴 것이지 아예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이 가운데 KBS 1TV는 새벽 0시 ‘KBS 중계석’을 통해 지난 6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제15회 대한민국 오페라 페스티벌 중 ‘나비부인’ 공연의 녹화 본을 방송하며 국민으로 하여금 극중 기미가요와 기모노 등을 보게 했다..
광복절 기념행사가 정부와 광복회/독립운동후손단체 간 서로 다른 곳에서 진행되어 논란이 되고 있는 가운데,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이 "일본에게 억지로 사과를 받아내는 게 진정한가"라며 "중요한 건 일본의 마음"이라고 밝혀 파장이 커지고 있습니다. 이에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는 18일 용산 청사에서 기자들과 만나 김 차장의 발언은 “일본이 우리를 존중하고 새롭게 부상하는 강력한 경쟁자로 여기면서 긴장하게 하고, 글로벌 질서에서 캠프 데이비드를 주도해나가고 인-태지역에서 한국이 적극적 역할을 펴는 모습을 경외하게 만듦으로써 ‘일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참 통탄할 일이다. 왜 이러는 걸까 ?
일제식민지배에서 해방을 한 후 친일매국자를 척결하지 못하고 그들이 해방이후 기득권을 차지한 잔재가 아직 정계, 사회, 경제계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탓일까 ?
소위 뉴라이트 사상을 가진 이들이 주장하는 바를 보면
나라를 팔아넘긴 이완용을 당시 구국을 위헌 충절의 일환으로 어쩔 수 없었다,
일제시대의 조선인들 국적인 일본에 있다라고 주장하는 XX들
일제식민기간 동안 한국사회가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정신나간 작자나
비록 의견이 달라도 정부 광복절 행사에 하나로 참여해야 했다는 인사 등등....
건국은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일로 봐야 한다거나
8월 15일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꿔야 한다거나
4.19혁명으로 쫓겨난 이승만을 국부라고 떠받치고 있다...
육사에선 홍범도 흉상을 철거하고
심지어 국방부는 독도를 영토분쟁 지역으로 표현해 논란이 된 정신전력교육 기본 교재를 수정하면서 국군의 역사에서 독립군·광복군 관련 서술에 홍범도, 김좌진 장군과 김구 선생 등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뺐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물어보자
3.1운동은 반정부시위인가 ?
임시정부는 반국가단체인가 ? 김구는 반국가단체 수장인가 ?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나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등 항일독립무장단체는 불법테러단체인가 ?
왜왕 히로히또에게 폭탄을 던졌던 이봉창의사는 자국의 왕에게 폭탄을 던진 왕 시해자인가>
상해에서 도시락폭탄을 던진 윤봉길의사나 일본 총독인 이또 히로부미에게 총을 쏜 안중근의사는 암살자인가 ?
일본이 미국에 무조건 항복을 하고 억압받던 식민국가였던 조선이 독립된 1945년 8월 15일은 망국절인가 ?
뉴라이트가 말하는 건국의 아버지라는 이승만은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개회식에서 "대한민국은 1919년 임지정부 수립과 동시에 건립되었다"고 발표했다.
1945년 8월 15일은 말 그대로 이미 있었던 대한제국이 일제에 점령당했다가 독립된 날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헌법에 대한민국의 적통은 상해 임시정부를 물려받는 걸로 되어있다.
그렇기에 건국이 1948년이라는 자들은 헌법을 유린하고 일제를 합리화 시키는 거라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승만을 국부, 건국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들은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하는 자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을 보면 "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 이념을 계승하고.."라고 되어 있는 바, 즉 이승만과 자유당의 독재정권을 공식 부정한 것이다.
그렇기에 일부 이승만 추종자들이나 소위 뉴라이트라고 불리우는 역사학자들은 헌법을 개정하여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미국 유학을 가서 하버드, 프린스턴대학에서 학위를 받으며 당시 프린스턴 대학교 총장이며 이후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윌슨에게 장학금을 받는 등 그 능력을 높이사서 임시정부로부터 미국 정계와 네트워크 형상의 대표 역할을 맡기는데 이승만이 자기를 임시정부 대통령 President로 소개한 것이다.
그래놓고 이승만은 미국의 대한국민회 (교민모임)의 기금을 맘대로 유용하고 심지어 건물들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자신과 추종자들을 위해 쓰고 그 대금은 대한국민회가 갚도록 할 정도로 후안무치였다고 한다.
심지어 단재 신채호 선생의 경우는 일제치하 때 일본 호적을 거부했는데,,, 해방 이후 이승만정권에서 <일제 치하에서 호적에 올리지 않은 자들은 독립운동가를 막론하고 국적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신채호 선생은 2009년 되어서야 한국 국적을 회복했다고 한다. 이게 도대체 무슨 X같은 상황인가 ?
이승만이 해방 이후 스스로 임시대통령을 자처하며 미국의 윌슨대통령에게 대리 통치 요청을 하자 신채호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았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 먹는다"라고 격분했다고 한다.
이후 이승만은 한국은행에 취직해서 일하던 신채호의 아들을 해직시키는데 영향을 미치게 하고했다고....
결국 신채호 아들은 계속해서 복직하려 노력했으나 번번히 거절당하다가 1960년 복직할 떄까지 넝마로 생계를 이어나갔다고 한다.
이토록 이승만은 매우 이기주의적이고 기회주의적이며 실제로 국민을 위하기 보다는 자신과 자신의 식솔들만을 챙기고 보았던 시야가 좁았던 똑똑한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당시 가장 대내외적으로 지명도 높고 존경을 받았던 인물은 안창호 그리고 여운형이었다고 한다.
도산 안창호선생은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을 앞두고 미국에서 벌고 모금한 돈을 가지고 중국으로 건너가 실질적으로 상해 임시정부를 세팅하고 세웠다.
그러나 당시 서울에 임시정부를 세운 이승만이 자신이 이후에 모든 독립운동을 주관한 것처럼 각색을 했다.
https://www.yka.or.kr/html/about_dosan/life_achievement.asp
무폭력 저항을 모르나 ?
국가와 정부가 잘 못된 길을 갈 땐 여러가지 행태로 저항하고 반대하고 올바르게 가길 꾀했던 한국 근대사의 저항운동을 모르나 ????
입닥치고 따라라 ???
그건 아니다.
일제 식민지가 끝났을 때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결과가 지금까지 이어지나 보다.
2차세계대전때 프랑스 망명정부를 이끌던 드골이 연합사령관인 아이젠하워와 1944년 노르망디상륙작전을 성공시키며 독일을 몰아낸 후, 독일에 부역하던 친나치 프랑스인 10만명을 숙청하고 특히 언론인과 지식인은 재판도 없이 1만명 정도를 사형을 시키며 "최소한 또 프랑스가 외세의 침략을 받을지언정 민족을 배신하는 프랑스인은 없을 것이다"라고 했단다.
이에 비해 한국은 이승만 정부가 들어선 후 친일파를 색출하고자 반민특위를 구성했으나 경찰들이 국회를 침입하며 반민특위를 해체시키는 바람에 친일파를 처벌하지 못하고 그들이 대한민국의 기득권으로 살아왔다. 이게 아직도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듯하다.
난 광복회장과 독립유공단체의 결정에 지지를 표한다.
https://www.youtube.com/shorts/s4Irf1w_y_0?feature=share
2024.08.19 기사를 보고
대한민국 정부는 주체의식을 확고하고 가져야한다.
https://v.daum.net/v/20240819133502908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임명·광복절 경축식 불참 여파 지속
尹, ‘아버지’라 부르던 이종찬에 “이해 안 가”
‘尹 절친’ 이종찬 아들 “尹, 중도지향 잃은 듯…문자 답 없어”
https://www.youtube.com/watch?v=S_T_JoPZk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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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은 일본인? 시대·역사적 맥락 고려할 때 맞지 않다”
[주간경향] “일제강점기 우리 선조들의 국적은 어디인가.” 누군가에게는 복잡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질문이다. 이 문제를 복잡하게 고민해야 하는 것은 역사 및 국제법 등의 학계다. 일본제국주의의 국권 찬탈이 왜 불법이고, 이것이 무효일 때 그 시대를 살아간 선조들의 귀속적 지위는 어떻게 되는지 등을 다양한 각도에서 연구해야 한다. 이는 향후 국제분쟁이 발생하면 유용한 무기가 될 수 있다. 반면 이 문제가 반드시 단순해야만 하는 집단도 있다.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음을 헌법 전문에 밝혀 둔 대한민국 정부다. 대통령 이하 공무원 모두가 해당한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에는 본인의 지위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선조들의 국적을 대답하지 못하거나 일본이라고 답변하는 이들이다.
일본 국적설의 근거는 국권 피탈이다. 반례는 차고 넘친다. 1945년 해방 직후, 일본에 있던 조선인은 무국적자로 분류됐다. 일본인이라고 보지 않은 것이다. 국민의 기본권리도 완전히 주어지지 않았다. 대신 민족적 구별은 분명했다. 이는 차별로 나타났다. 주간경향은 지난 8월 27일 일제강점기를 연구한 두 명의 젊은 역사학자를 서울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김강산 박사는 1923년 발생한 간토대학살을 연구했다. 김태현 박사는 조선총독부의 임업 정책을 연구했다. 두 사람의 연구는 제국과 식민지,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별을 잘 보여준다. ‘조선인=일본인’이라는 인식의 반례가 될 수 있다. 이제 막 전문 연구자의 길에 들어선 두 사람 앞에 던져진 ‘뉴라이트’라는 변수에 관해서도 들어봤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일본인’이라는 주장은 어떻게 봐야 하나.
김강산(이하 산) : “먼저, 일제강점기 선조들이 조선인이었냐, 일본인이었냐를 이분법적으로 묻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질문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국적 적용에 관해서는 일제의 의도된 모호함이 있었다. 식민지 조선인이 해외로 나갈 땐 일본 여권 등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조선인=일본인’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 일제가 일본인에게 적용한 국적법이 조선인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게다가 같은 국민이라면 차별 없이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하는데 참정권이나 의회 구성 등에서 조선인에게는 아무런 권리도 주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차별적 요소가 다수 발견된다. 일제는 필요에 따라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보기도 했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시대적·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조선인=일본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맞지 않다.”
당시 ‘국적이 일본이다’까지만 말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국적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으로서 권리, 의무가 발생했느냐다. 당시에는 호적부터 일본적·조선적을 구분해 차별했다. 이에 따라 국민이라면 누려야 할 권리를 얻지 못했다.
- -김태현
김태현(이하 현) : “당시 ‘국적이 일본이다’까지만 말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국적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으로서 권리, 의무가 발생했느냐다. 당시에는 호적부터 일본적·조선적을 구분해 차별했다. 이에 따라 국민이라면 누려야 할 권리를 얻지 못했다. 일본 국적이니 창씨개명도 한 것 아니냐고 하는데 창씨개명을 두고도 일본 내에서 ‘앞으로 조선인·일본인을 구별하지 못하면 어떡하냐’는 우려가 나올 정도였다. 그만큼 구분돼 있었다는 의미다. 당시 국적이 어디냐만 따지는 것은 ‘식민지 강제동원 등도 합법이다’라는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조선인=일본인’이라는 주장의 반례가 많지 않나.
산 : “1923년 9월 1일 발생한 일본 간토대학살 관련 연구를 했다. 당시 조선인은 ‘조선인이라서 죽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지진이 일어나고 하루 뒤 내무성이 계엄령을 선포하는데 이때 공식적으로 불령선인 침입을 경계하라고 경고한다. 조선인 폭도들이 찾아갈 테니 방비하라는 유언비어를 유포한 것이다. 이로 인해 계엄군이나 자경단이 조선인을 학살할 명분을 가지게 됐다. 과연 조선인과 일본인이 같은 국적이고 동등한 입장에 있었다면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겠나.”
-차별이 존재했다면 ‘일제가 조선을 선의로 근대화했다’고도 볼 수 없는 것 아닌가.
현 : “뉴라이트와 반(反)뉴라이트 세력 간에는 공통점이 있다. 근대화를 반드시 달성해야 할 ‘가치’로 본다는 것이다. 그 결과 한쪽은 ‘근대화를 시켜준 만큼 일제도 좋다’는 결론을 내고, 또 다른 한쪽은 ‘그 좋은 근대화를 일제가 해줬을 리가 없다’로 결론을 낸다. 따지고 보면, 일제가 조선을 근대화했다는 것도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일제는 1926년 목재 대외무역수지 적자가 1억엔을 돌파하면서 각 식민지에서 목재 자원 조달계획을 세웠다. 당시 조선은 산림 자원이 매우 부족했다. 일제는 조선의 목재 부족이 심각해지면 일본으로부터의 목재 이입이 증가할 것을 걱정했다. 이에 따라 자급자족을 기본으로 한 조선 산림 개발을 한다. 이 과정에서 벌채 및 조림 비용은 국유림 벌채 수익으로 충당하기로 했는데 일제가 조선의 사방사업(수력 및 풍력에 의해 토사·자갈이 이동해 발생하는 각종 재해를 예방하고 복구하는 공사) 공채비를 감액하거나 사실상 주지 않아서, 국유림 벌채 수익으로 충당하게 된다. 이로 인해 조림 정책에 투입할 비용은 부족해졌다. 즉 일제는 조선에 근대적 임업 정책을 도입했지만 이를 실시한 이유는 일본의 목재 무역수지 적자 때문이었다. 사업이 부실화된 원인은 일본이 사업 공채 등의 재정적 투자를 사방사업 등에 하지 않고, 철도 등의 군사 관련 시설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이를 보면 중요한 것은 단순히 근대화됐느냐가 아니라 근대화의 성격임을 알 수 있다. 개발이냐, 수탈이냐 식의 이분법만으론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뉴라이트는 수치나 통계를 내세워 정당화 한다.
현 : “쌀 생산량이 늘어나고, 철도가 깔리는 것 등을 수치나 통계로 보여주는 것인데 문제의식이 거기에만 머문다는 것이 한계다. 이들은 식민지에서도 자본주의가 싹틀 수 있고, 자본주의야말로 달성해야 할 최고의 선으로 본다. 이에 따라 당연히 자본주의 성장을 증명할 수 있는 통계에 매몰된다. 성과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해당 연구를 통해 식민지 운영이 ‘원시적 수탈론’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내기도 했다. 다만 이러한 방식이 논박되자 이를 개선하기보다 ‘민족주의가 문제다’란 방향으로 전환했다. 이 시점에서 학문적 논의는 더 이상 불가능해진 것이다. 이들이 맹신하는 경제성장 수치 등을 정립한 미국 경제학자 사이먼 쿠즈네츠 역시 ‘통계가 그 사회의 성격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통계는 역사를 해석하는 데 중요한 참고자료이지, 통계 자체가 역사는 아니다.”
뉴라이트가 수치나 통계를 내세우는데, 역사 연구하는 데 있어 수치나 통계는 중요한 자료다. 다만 정보에도 맥락이 있다. 그런데 이들은 모든 문제를 경제성장 여부에 집중하고, 이 과정서 발생한 문제는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한다.
- -김강산
산 :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수치나 통계는 중요한 자료다. 다만 이러한 정보에도 맥락이 있다. 예를 들어, 간토대학살의 경우 여러 주체로 작성된 학살자 수 통계가 발견되는데 이를 연구할 땐 ‘자료 작성 주체가 누구냐’, ‘과대 혹은 축소했을 가능성이 있나’ 등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단순히 자료를 발굴했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이를 어떤 방식으로 해석할 것이냐까지가 역사학자 몫이란 의미다. 그런데 뉴라이트는 자료 이후 단계를 말하지 않는다. 단순히 ‘이러이러한 수치를 보니 일제강점기 한반도 경제가 성장한 것을 증명했다’로 끝난다. 결국 모든 문제를 경제성장 여부에 집중하고, 이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는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누리는 번영, 자유 등의 토대가 일제강점기에 마련됐다는 결론을 상정하고 연구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른바 ‘뉴라이트’로 분류되는 인물들을 정부 산하 역사 관련 기관 요직에 임명하고 있다.
산 : “꼭 다수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만 기관장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역사 관련 정부기관은 국민의 역사의식을 정립해 가는 곳이다. 이런 자리에 사회가 공유하는 인식과 동떨어진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임명되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런 분이 국민 통합에 앞장서겠다고 말하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연구자 처지에서 볼 땐 이는 연구환경 변화와 직결된다. 지난해가 간토대학살 100주년이었다. 그런데 독립기념관에서 개최 예정이었던 ‘일본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100주기 전시회’가 돌연 취소됐다. 최근 언론 보도 등에 따르면 국가보훈부의 압박이 있었다고 한다. 간토대학살은 좌·우의 문제가 아닌 무고한 조선인이 일본에서 살해당한 사건이다. 이러한 사건 관련 전시까지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할 수 없다’는 분위기라면 어디까지 자유롭게 연구가 가능하고, 어디까지가 불가능한지 알 수 없게 된다. 그 경계가 완전히 허물어진 느낌이다.”
현 : “정부의 뉴라이트 인사 임명에 대해서는 학계 성명서에도 서명했고, 언론 비판에도 동의한다. 이렇게까지 문제가 된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다만 한 가지 생각해봤으면 하는 지점이 있다.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임명에는 집중 비판이 나왔지만 동북아역사재단, 한국학중앙연구원, 국사편찬위원회에 유사한 성향 인사가 임명될 때는 이 정도 비판은 없었다. 김 관장은 학계에서 활동한 사람도 아니고, 독립운동 관련 단체에서 활동한 사람도 아니다. 반면 다른 기관에 임명된 인사들은 뉴라이트 성향으로 분류됐지만 서양사, 경제사 등에서 나름의 성과를 낸 인물들이었다. 즉 엘리트 의식이 반영된 학맥과 학력에 따라 선택적 비판을 하는 것은 아닌가 우려스럽다. 독립기념관뿐만 아니라 역사 관련 기관장을 임명할 때는 명확한 평가 기준과 해당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인사가 임명될 경우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한 학계의 의견이 정립될 필요가 있다.”
-뉴라이트의 주장은 계속 존속될 수 있다고 보나.
산 : “낙성대경제연구소에서 월례발표회 등을 하는 것을 보면, 연구는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새로운 학자가 등장하기보다는 여전히 안병직, 이영훈 등의 익숙한 이름만 나오는 것 같다. 뉴라이트는 <반일 종족주의> 출간과 함께 스스로 학문적 논의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한다. 해당 책에서 주장한 내용 역시 이미 학계에서 논박됐던 것들이다. 즉 뉴라이트는 1970~1980년대 학계가 주장했던 내용과 여전히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역사 연구자들이 더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이런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다면 해소될 문제라고 생각한다.”
현 : “정치적 선동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학문적 재생산 역시 되지 않고 있다. 이들 연구가 학계나 사회에 기여하는 것도 아니고, 친일 논란만 만들지 않나. 뉴라이트는 본인들을 ‘순교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한국이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일본과의 협력이 필수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에 방해되는 반일감정을 뿌리 뽑겠다는 인식 구조다. 그래서 이들이 학자적 양심을 가졌다기보다는 정치적 신념을 가졌다고 평가한다. 더 이상 이러한 뉴라이트를 상대로 우리 사회가 ‘근대화냐, 수탈이냐’라는 이분법적 논의에 매몰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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