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자연, 음악, 여행의 조화를 찾아

취미, 건강, 세상 이야기/재미로 보는 세상 (취미 등)

중국의 역사 (원고~주왕조)

SaintShin 2022. 10. 24. 21:12

원고시대(遠古時代)

 

중국의 조상, 반고(盤古)

 

반고는 우주 가운데 1만 8천년을 잠들었다 깨어나, 자신의 키를 하루에 한 장(丈)씩 키워 다시 1만 8천년 동안 하늘은 밀어 올리고 땅은 발로 밟아 내려 천지 간의 거리가 9만리가 되게 했다.

 

그리고 반고는 쓰러져 헐떡 거리 는 입김은 구름이 되고, 안간 힘을 지른 고함은 번개불이 되었고, 죽게 되자 왼쪽 눈알은 태양이 되고 오른쪽 눈알은 달과 별이 되었다고 한다. 몸속의 피는 바다와 호수가 되고 땀과 눈물은 아침 이슬이 되었다.

 

옛날 사람들은 자연의 모든 현상이 그것을 주재하는 어떤 거대한 존재에 의해 이루어 진다고 보았다. 그래서 비나, 바람, 이슬, 눈은 물론이고 지진이나 일식, 태풍까지 신(神)의 조화로 돌렸다.

 

재미있는 것은 천둥과 번개에 대한 인식이다. 옛날에는 모두 신(神)의 조화로 알았다. 그런데 그들은 거대한 천둥소리가 지상(地上)에 부딪쳐 메아리치는 것을 두고 만물(萬物)이 그 소리에 반응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천둥 소리가 크게 울리면 반응도 크고 작으면 작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천둥소리에 함께 따르는 것을 뇌동(雷同)이라고 표현했다. 이처럼 뇌동(雷同)에는 옛 조상들의 과학지식이 담겨 있다.

 

그러나 부화 (附和)든, 뇌동(雷同)이든 상대방의 의견에 무조건 따르는 것이므로 좋은 뜻은 아니다. 타협과 절충보다 아집과 독선으로 일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뚜렷한 자기 주관 없이 맹목과 방종으로 일관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이 부화뇌동(附和雷同) 이다. 부화(附和)란 무조건 남의 주장에 따르고 아부하는 것을 말하며, 뇌동(雷同) 역시 같은 뜻이다. 굳이 '천둥'을 뜻하는 '뇌(雷)'자를 덧붙여 뇌동(雷同) 이라 한데는 위와 같은 까닭이 있으며, 이를 부화뇌동(附和雷同 - 붙을 부, 화할 화, 천둥 뇌, 같을 동)이라 하는 것이다.

 

세상의 동쪽에 하늘을 찌를 듯한 뽕나무가 있었고 그 그늘에는 천제(天帝)의 아들 열 명이 살았는데, 다리가 셋 달린 황금새 모양들이었다. 그들은 하루에 하나씩 하늘에 올라갔는데, 그 것이 태양(太陽)이다. 수억만년 동안 차례로 하늘에 올라가는 것이 싫증이 나서 한꺼번에 하늘에 올라가자 하늘과 땅은 펄펄 끓고 땅의 사람들이 뜨거워서 난리가 났다. 지상에는 이상한 괴물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자 아들들의 잘못을 알게 된 천제는 천신(天 神) 중에 신예(神羿)를 지상에 내려 보내 수습하게 하였다. 지상의 괴수들을 없애고 활을 잘쏘는 신예는 그 활로 하늘의 황금새를 차례차례 쏘아 떨어 뜨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10마리가 모두 떨어지면 세상은 암흑이 될 것을 걱정한 요나라 임금이 활을 하나 숨겨서, 지금까지 다행히 태양이 하나 남게 되었다.

 

천제의 아들을 죽인 것 때문에 천제는 신예에게 상을 주기는 커녕 마누라인 상아와 함께 신적(神籍)에서 지워 인간 후예(后羿)가 되게 하였다. 같이 인간이 된 상아가 후예에게 바가지를 긁자 후예는 발사약을 얻기 위해 곤륜산 (崑崙山)의 서왕모(西王母)를 찾아가나 단지 두 알만 얻어온다. 한 알을 먹으면 죽지 않고 두 알을 다 먹으면 하늘로 올라가게 되는 데, 하늘로 올라갈 욕심이 있던 상아가 두 알을 모두 먹고 하늘로 올라가 버린다. 하늘로 올라 온 상아를 천제는 남편까지 버린 죄를 물어 두꺼비로 만들어 버렸다.

 

세월은 흘러 6천년 전 중국의 대지는 4개의 종족인 서북의 적족(狄族), 동북의 이족(夷族), 남서의 강족(姜族), 남동의 묘족(苗族)이 떼지어 살게 되었다.

 

 

삼황(三皇) 시대

 

중국의 역사를 잘 정리한 사람은 사마천(司馬遷)인데, 원고시대에 해당하는 반고, 여와, 신예... 등과 삼황오제(三皇五帝) 중 삼황에 해당하는 부분은 사람이 조작한 것에 불과하다고 빼고, 오제부터 중국의 역사를 정리한 것이 바로 사기(史記)이다.

 

삼황(三皇)은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이라고도 하고 복희씨, 여와씨, 신농씨 혹은 수인씨, 복희씨, 신농씨 라고도 한다.

오제 (五帝)는 황제, 전욱, 제곡, 당요, 우순이라고도 하고 태호, 염제, 황제, 소호, 전욱이라고도 한다.

 

어쨌든 중국의 원시사회 때의 걸출한 인물들이 나타나 백성을 이끌며 큰 업적을 이룬 것을 의미하여 삼황오제(三皇五帝,  sang huang wu ji)라고 한다.

원시시대의 인류는 늘 맹수의 공격을 받아 죽곤했는 데, 유소(有巢)씨라는 사람이 나무 위의 집을 발명하였다.

구석기 시대인 이때는 수인(燧人)씨라는 사람은 불을 발견하고 생식을 하던 습관을 익혀서 먹게 하였다.

수인씨의 뒤를 이어 복희(伏羲)씨가 원시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며 목축과 사냥기술을 발달시켰다. 복희씨는 하늘, 땅, 번개, 바람, 물, 불, 산, 연못 등의 8개의 자연 현상인 팔괘(八卦)를 음양(陰陽)으로 조합하여 표현하여 팔괘도(八卦圖)를 창조하여 문명의 시작을 하였다.

 

여와라는 신이 심심하여 하늘에서 땅에 내려와 물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진흙을 빚어 사람들 만들었고 더 많은 진흙 방물을 칡넝쿨로 튀어 나가게 하여 많은 사람을 만들었다고 한다. 여와와 복희는 친남매였지만 곤륜산(崑崙山)에서 천지신명께 제사를 지내고 혼인하여 자손을 퍼트림으로써 인류의 시조가 되었다.

 

세월이 흘러 원시인들은 모계(母系) 씨족사회를 형 성했는 데, 이때의 우두머리가 신농(神農)씨이고 농사하는 법을 개발하였으며 각종 풀을 맛보고 약을 개발하여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여 주었으며 궁상각치우(宮商角徵羽)의 5개 줄을 가진 거문고와 같은 각종 악기도 개발하고 사람들이 물물교환을 할 수 있게 시장을 세웠다.

 

이때 동북쪽 산동성 지역의 민족이 동이(東夷)족인데, 치우(蚩尤)가 왕이었다. 포악하고 잔인한 치우는 서서히 아래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나갔다. 이 동이족은 여진족과 한반도의 한족(韓族)의 조상으로 알려져있다. 치우는 중국의 후세에 ‘전쟁의 신’으로 추앙된다. 신농씨가 천하를 다스리던 말기에는 두 개의 큰 부족 생겨났는 데, 희(姬)씨 성을 가진 황제(皇帝)족과, 강(姜)씨 성을 가진 염제(炎帝)족이다. 이들은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여왔다. 치우는 한반도 사람들의 조상으로 알려져 있다.

 

오제(五帝) 시대

 

기원전 3000년 전, 원시시대 말기에 중국 사람들은 농사가 잘되는 황하(黃河,, Huanghe)와 양자강(揚子江, Yangzijiang) 유역에 씨족부락을 형성하고 살았다.

 

이 유역에서 부보(附寶)라는 여인이 공손(公孫)과 결혼하여 황제(黃帝)인 헌원씨(軒轅氏)를 낳았다. 헌원은 총명하여 창과 방패를 만들고 병법을 만들었다. 그러자 많은 제후들이 헌원씨 밑으로 복속이 되었고 헌원은 황제(皇帝)가 되었다. 황제 족과 염제족이 민족이동을 하는 과정에서 판천(판천)이라는 곳에서 세차례를 전투를 하여 결국 염제족이 대폐하고 만다. 이를 판천대전(阪泉大戰)이라고 한다. 염제족 중에는 형천(刑天)이라는 사람이 있었는 데, 그는 패배한 부족 의 복수심으로 끝까지 황제족에게 저항한다. 잡혀서 머리가 잘렸는 데도, 다시 살아나 젖으로 두 눈을 삼고, 배꼽으로 입을 만들어 계속 항쟁의지를 보였다고 한다.

 

먼 훗날 동진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은 그의 불굴의 의지를 찬양하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동북쪽에는 치우가 있었는데, 이미 구리를 사용할 줄 알았고, 날카로운 신병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헌원 황제는 나침반과 지남거(指南車)을 발명하여 탁록(涿鹿)이라는 곳에서 치우와 싸워 치우군은 대패하고 치우는 사망한다. 이 탁록전쟁(涿鹿)戰爭)은 중국 고대전쟁의 기원이다. 헌원 황제는 이 이후에도 배를 만들고 누에치기, 역법, 수레 등을 발명한다. 이렇게 해서 황화와 양자강 주변에 화하족(華夏族)을 이루니 이것이 한족(漢族)의 시작이다.

 

당시에는 선위(禪位)라고 하여 자식에게 왕위 를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남은 사람 중에 가장 줄난 사람을 골라서 왕위를 물려주었다.

 

황제 시대에는 8가지 재료를 가지고 악기를 만든 영윤(彾倫)이라는 전설적인 악사가 있었다. 그는 음의 5개 소리를 궁(宮), 상(商), 각(角), 치(徵), 우 (羽)라고 정하여 5성(聲)이라 하였으며, 악기를 8가지로 진흙으로 구워 만든 것을 훈(塤), 가죽으로 만든 것을 고(鼓), 박으로 만든 것은 생(笙), 참대로 만든 것은 관(管), 실로 줄을 매어 만든 것은 현(弦), 금속으로 만든 것을 종 (鐘), 돌로 만든 것을 경(磬), 나무로 만든 것은 축이라 하여 8음(音)이라 하였 다. 이 8가지 악기를 잘 배합하고 음의 고저를 12율(律)로 통일하면 아름다 운 음악이 되었다.

 

황제는 이 음들을 바탕으로 다른 악사인 영장(榮將)에게 금속으로 종(鐘)을 만들라고 했으니 그것이 편종(編鐘)이다. 원시시대에는 끈에 매듭을 만들어 어떤 일을 기록하였으며, 복희씨는 8괘 를 이용하여 기록을 하였으나, 표현의 한계가 있었다. 기원전 4500여년 전, 황제시대에 사관(史官)인 창힐이라는 사람이 동식물과 자연현상을 바탕으로 글자를 발명하였다. 이는 나중에 만들어질 갑골문자보다 1000여년이 앞선 것 이다. 황제는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하여 천하의 현자를 구하였는데, 꿈마다 현자를 찾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풍후(風后)라는 사람을 승상, 역목(力牧)이 라는 사람을 장군으로 책봉하고 이 밖에도 상선(常先), 대홍(大鴻), 봉호(封 胡), 태산계(太山稽) 등의 현인을 찾아 선생으로 보시거나 벼슬을 주었다.

 

황제가 낙수(洛水)라는 곳을 순시하는 데, 거북이가 두툼한 책을 짊어지고 헤엄을 치자, 황제가 제사를 지내자 거북이는 그 책을 황제에게 하사하고 사라졌다, 이 책이 바로 유명한 하도낙서(河圖洛書)이다. 이 책은 중국에서 예언(豫言)이나 수리(數理)의 기본이 되는 책이다.

 

또한 황제 초창기에는 수많은 발명가가 탄생했는 데, 용성(容成)은 역법(曆法)을 만들어 계절의 규칙을 만들 었고, 호조(胡曹)는 옷을 만드는 법을 개발했으며, 뇌공(雷公)은 경맥을 찾아 내외술기경(內外術岐經)이라는 의학서적을 썼으며, 기백(岐佰)은 약초로 병을 치료하며 본초(本草), 소문(素問)과 같은 의학서적을 써서 신농씨 때보다 한층 의학을 발달시켰다. 유부(兪跗)라는 사람은 침술(鍼術)을 발명하였고, 번우(番 禺)는 배를, 길광(吉光)은 마차를 발명하였다. 특별히 영봉(寧封)이라는 사람은 불로 구운 토기를 발명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으나, 나중에는 불가마에 타죽고 만다.

 

황제시대에 가는 길이 험난하여 중원과는 발길이 뜸한 사천성 유역에는 촉(蜀)나라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두우(杜宇)라는 왕이 있었는 데, 무산(巫山) 이라는 곳에 홍수가 빈번하여, 별령(鱉靈)이라는 사람에게 시켜 무산을 뚫어 삼협(三峽)을 개척하여 홍수를 막았다. 그러나 두우는 별령이 공사를 하는 기간 동안 별령의 아내와 간통을 하였는 데, 별령이 돌아오자 자신의 부끄러움을 알고 별령에게 왕위를 양도하였으며 별령은 나라이름을 개명(開明)이라 고쳤다. 두우는 서산에 들어가 은거하며 도를 닥았는데, 나중에 두견(杜鵑)새로 변하여 구슬프게 울게 되었다고 한다.

 

황제는 말년에 천하를 잘 다스린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수산(首山)의 구 리를 캐어 형산(荊山) 아래에 세발이 달린 큼직한 솥인 정(鼎)을 만들자 하늘에서 용이 날아와 황제와 신하들을 태우고 승천하였다고 한다. 황제는 중국의 역사상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사람이다.

 

치우가 죽은 후 동이족은 황제의 아들인 소호(少皞)라는 수장이 나타나, 산동성 곡부(曲阜) 일대에서 거주하였다. 소호족은 새를 숭상하였다. 황제와 소호 이후에 창의의 아들이자 황제의 손자인 전욱이 향후 춘추시대의 위나라가 건국한 하남성에 거주하였는 데, 고상한 품격을 가진 8명의 사람을 등용하여 나라를 다스렸는데, 이들을 심신이 즐거운 사람들이라 하여 8개(8 愷)라고 불렀다. 전욱은 도처에서 사람들이 나름대로 신에게 제사를 지내거나 무당을 통해 제사를 지내자 신의 존엄을 더렵혀져 신을 노엽게 하여 재 난이 심해지자 천신에게 드리는 제사를 귀족들만이 할 수 있게 하였다. 이때 부터 고대사회에서 귀천의 차이가 생기게 되었다. 황제의 부락보다는 뒤졌지만 물의 신 공공(共工)의 씨족부락이 있었는데, 전욱의 견고한 통치에 질투를 하고 있었다.

 

공공과 불의 신 축융(祝融)이 싸움을 하였는데, 성질이 급한 공공이 하늘과 땅을 잇고 있던 부주산(不周山) 에 몸을 부딪혀 하늘은 구멍이 나고 땅덩어리가 기울어졌는데, 홍수가 나고 놀란 괴수들이 사람들을 해쳤다. 사람들의 어머니인 여와는 사람들에게 괴수를 물리치는 방법을 알려주고 바닷가에 살던 거북이를 불러 거북이의 네 다리를 이용하여 사방의 땅의 균형을 잡았는데, 완전하지 못하여 지금도 중국의 서북쪽이 높고 동남쪽이 낮게 되어 버렸다. 전욱 이후에 황제의 증손 자인 고신(高新)씨가 수장이 되었는 데, 그가 제곡(帝嚳)이다. 제곡은 첩을 넷을 두었는데, 본처가 낳은 아들 기(弃)는 후에 주(周)나라의 국왕 시조가 되었 고, 들째 아내가 낳은 아들 계(契)는 상(商)나라 국왕의 시조가 되었다. 제곡의 아들들은 모두 충성스러워 순임금에게 모두 등용되었다.

 

이 시대에 잠녀(潛女)라는 처녀가 있었다. 한번은 아버지가 외출해 집에 돌아오지 않자 집에서 기르던 숫말에게 아버지를 모셔오면 숫말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하자, 그 말은 단숨에 달려가 아버지를 모셔왔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고마움의 표시로 여물을 주자 말이 먹지 않자, 딸에게 그 이유를 묻고나서 그 이유를 알자 말을 활로 쏘아 죽인 후 껍질을 벗겨 마당에 널어 말렸다. 하루는 딸이 그 말가죽 위에서 놀았는데 갑자기 회오리 바람이 불어 말가죽에 감싸인 딸이 하늘로 사라졌다. 얼마 후 커다란 나무의 가지에서 말 가죽 조각을 발견했는데, 딸이 누에로 변해있었다.

 

요순(堯舜) 시대

 

 

황제, 전욱, 제곡에 이어 요(堯)임금이 선위를 했는데, 사슴가죽으로 옷을 입고 다니는 등 어질고 지혜로웠다.

요임금이 늙자 허유(許由)라는 사람에게 선위를 하려고 하자 허유는 기산(箕山)이라는 깊은 골짜기에 몸을 숨겼다. 허유는 더러운 이야기를 들었다고 강가에서 귀를 씻고 있었는 데, 허유의 친구 소부(巢父)라는 사람이 소에게 물을 먹이러 왔다가 그 말을 듣고 소에게 더러운 물을 먹지 말라고 하면서 허유가 귀를 씻던 자리보다 상류로 올라갔다. 요임금은 순(舜)이라는 사람을 찾아 후계자로 눈여겨 보고 있었다. 너무나 궁색하여 요임금은 재물을 하사하였는데, 계모와 배다른 동생이 이를 노려 순을 죽이려 한다. 지붕을 고치라 하고 불을 지르고 우물을 청소하라하고 돌로 메워도 살아남는다. 결국 선양을 통하여 순이 천자가 된다. 태평성대를 이루었으나, 한가지 걱정은 황하의 범람에 의한 홍수였다.

 

요임금 이후 순 (舜)임금이 태평성대를 이끌었는데, 이 두 시대가 중국 역사상 가장 평화롭고 이롭던 때로 요순시대(堯舜時代, Yoxunqi)라고 한다. 황하에는 치수(治水)을 잘하는 우(禹)라는 사람이 있었는 데, 우가 순의 뒤 를 이어 천자가 되어 치수를 잘 하였다.

 

3황은 일반적으로 복희씨(伏羲氏), 신농씨(神農氏), 여와씨(女媧氏)를 말하며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 또는 泰皇)이라고도 한다. 5제는 황제(黃 帝), 전욱(顓頊), 제곡(帝嚳) ·제요(帝堯), 제순(帝舜)을 말한다.

 

 

하은주 (周) 왕조

 

하왕조(夏王朝)

하왕조에서 은왕조까지는 기원전 2070년부터 기원전 1046년까지를 말한다.

하나라의 첫 번째 군주는 우(禹)다. 우는 광활한 대지에서 홍수를 다스니느라 한 번 집을 떠나면 8년이나 밖에 나가 있었다. 과로와 영양부족으로 몸이 나뭇가지처럼 말랐고 머리카락은 덥수룩하였고 발에는 못이 박혀 잘 걷지 못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러한 우를 칭송하여 ‘위대한 우’라는 의미로 ‘대우(大禹)’라고 하였다.

 

우는 주변의 제후국들을 참가시킨 제후대회를 개최하였으며, 역사적인 의의가 있는 집회를 기념하기 위하여 헌납받은 청동으로 아홉 개의 대정(大鼎)을 주조하여 천하만국이 하왕의 관할하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었다. 이 대정들에는 많은 신과 간신의 상이 새겨져 있는데, 천신을 경모하고 간사한 무리를 배척하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이것이 아홉 개라고 하여 구정(九鼎), 또는 구룡신정(九龍神鼎)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가지는 사람이 천하의 주인이라는 제왕의 권력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하여, 누구나 가지려고 서로 쟁탈하는 신기(神器)가 되었다.

 

우왕은 죽으면서 백익(伯益)에게 선양하였으나, 백익은 우왕의 3년상을 마 치고 우왕의 아들 계(啓)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 이때부터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세습(世襲)제도가 생겼다. 이때가 하(夏)나라로 중국 최초의 왕조였으며, 400여년을 지속하고 말희(末喜)라는 미녀에 빠져 나라를 망친 17대 걸(桀)왕때 멸망한다. 하나라 말기에 포(褒)의 조상이라는 용이 나타나 이상한 침을 흘리고 사라지자 왕은 그 침을 단단한 상자에 담아 자손대대로 물려주라고 하였다. 그 이후 800년 동안 이 상자는 열리지 않고 보관되었다.

 

은왕조(殷王朝) [= 상왕조(商王朝)]

하나라 이후 은나라가 수도 이름을 상(商)이라고 불렀다. 이로 인하여 은나라를 비화하는 사람들이 상(商)나라라고도 부른다.

은나라는 1대 탕왕(湯王)으로부터 496년간 31대 주왕(紂王)까지 실존하였다.

 

탕이 왕이 되기 전 유신국의 유신씨(有莘氏)의 요리사로 이윤(伊尹)이라는 유명한 요리사가 있었는 데, 이윤을 얻기 위해 그의 딸을 아내로 삼겠다고 유신씨 수장에게 제안하자 이윤을 딸의 노예로 삼으라는 엉뚱한 제안을 하자, 탕은 유신을 얻기 위해 노예로 삼아 데리고 온다. 이를 잉신(媵이라 하는데, 노예를 함께 출가한다는 의미이다. 이윤은 탕을 도와 하나를 멸망시키고 상왕조를 건립하는데 공로를 세운다. 하나라를 빼앗기 위해 하나라의 내부사정을 알기 위해 충성스럽고 달변인 이윤을 간첩으로 파견하려고 하자, 이윤은 상왕 탕에게 자신에게 활을 쏘아 상처를 입히라는 고육계(苦肉計)을 써서 하왕 걸이 자신을 믿게 하였다. 이윤은 100세까지 살면서 모두 5명의 왕을 보좌하였다. 하나라 말기 상나라 초기에 변수(卞隨)와 무광(務光)이라는 사람들이 있었 는 데, 사상이 낡고 구습에 얽매어 새 것을 반대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지칭 되는데, 상 탕이 부패한 하왕조를 멸한 것이 정당치 못하고 패륜이라고 여겨 누수(盧水)라는 강에 돌을 짊어지고 뛰어 자살을 한 일이 있었다. 이들은 주(周) 무왕(武王)이 상 주왕(紂王)을 뒤엎은 후 백이(伯夷), 숙제(叔齊)가 수양 산에 들어가 굶어 죽은 것과 같이 우매한 사람들로 지칭이 되고 있다.

 

고대에는 군왕이 죽으면 새오 왕위에 오르는 아들이 3년 동안 영구를 지킨 후에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는 상복을 입고 애통한 표정을 해야만 했는데, 제위에 오른 상왕 무정은 삼 년동안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를 삼년불언(三年不言)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무정의 총명한 지략에 의한 것이었다.

 

국왕이 3년 동안 말 한마디를 하지 않으니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킬 것이며 국왕의 말 한마디는 나라를 진흥시키는 데 중요한 작용을 하게하는 책략이었다. 이로 인하여 묵이사도(默以思道), 즉 묵묵히 나라를 다 스리는 책략이라는 말로도 표현된다. 왕 해(亥)가 즉위 했을 때는 목축업에 전념하였고, 목축업이 발전하면서 잉여물이 많이 생기자 그것을 교환하기 위하여 주변국과 무역을 하였다. 상 족 사람들의 무역이 번성하여 그들을 상인(商人)이라 불렀는 데, 오늘 날 장 사하는 사람들의 유래가 되었다. 은나라는 짐승의 뼈에 글자를 새기는 갑골문자(甲骨文字)로 유명하였다.

 

은나라의 마지막 천자인 주왕(紂王)은 백성의 고혈을 짜서 녹대(鹿臺)라는 보물창고를 지어서 세금을 올려 재산을 축적하였다.

 

주왕조(周王朝) 

주왕조(周王朝) 하나라와 상(은)나라를 이어 천하를 통일한 나라가 주(周)나라 인데, 기원 전 1046년부터 기원전 771년까지를 주왕조 또는 나중에 주나라가 멸망하면서 동쪽으로 이동하여 건립된 동주(東周)와 구별하기 위하여 서주(西周)라고 칭한다. 주족(周族)은 이미 요순 때부터 활동해 왔는데, 1000년이 지나서 천하를 통일하고 나라를 형성하였다.

 

주나라의 선조는 기(棄)라는 사람인 데, 천재적인 농업기술로 요임금 시절 농업을 주관하는 벼슬을 하였다. 이후 공류(公劉)가 주족을 데리고 환경이 좋은 곳으로 이주했으며, 공단부(公亶父) 때 는 강대한 나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공단부는 오로지 부인 강씨 만을 사랑하여 일부일처를 실행에 옮긴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공단부는 막내아들인 계력(季歷)의 아들 창(昌)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그것을 안 공단부의 큰 아들 태백(太伯)과 둘째 아들 중옹(仲雍)은 자리에 미련을 두지 않고 약초를 캐러 간다고 하면서 남으로 내려가 그곳의 토착민 들에게 선진문물을 가르치며 오(吳)나라 ‐ ‘구오(句吳)’라고 구별하여 부름 ‐ 를 세워 큰 아들인 태백이 왕이 되었다.

 

주나라는 계력이 왕위를 이어 무왕 (武王)이 되었는데, 아직 상(은)나라보다 힘이 약하여 조공을 바치고 있었으며, 은나라의 목사로서의 계력은 융족을 쳐서 대승을 거두었으나 은나라왕 문정의 질투를 받아 색고(塞庫)라는 감옥에 가두자 계력이 분에 못이겨 죽고 말았는 데, 그의 아들인 창(昌)은 복수를 결심한다. 창은 모친이 돼지우리에서 소변을 보다가 낳은 아들로 유명하다.

 

은나라의 서쪽에 있던 주(周)나라는 문왕 서백 창(昌) ‐ 당시 창은 상나라 주왕의 책봉을 받아 서부지역의 제후들의 수장이었기 때문에 서백이라 불렸다 ‐ 이 다스리게 되었는데, 주나라에 창의 셋째아들인 단(旦)이 달기(妲라는 여자아이를 데려다가 은나라의 폭군인 주왕이 좋아하는 완벽한 요부로 키운다.

 

주나라는 심한 기근으로 조공을 바칠 수 없다는 핑계로 미인계를 쓰기 위해 달기를 주왕에게 바친다. 달기에 빠진 주왕은 달기가 시키는대로 잔인한 행위를 서슴치 않는다. 달기에 빠진 주왕은 ‘녹대(鹿臺)’라는 궁궐을 짓고 연못에 술로 채우고(酒池), 고기를 숲처럼 매달아 놓고(肉林) 많은 사람들이 방탕하게 먹고 즐기며 타락하게 만든다. 이를 주지육림(酒池肉林)이라고 한다.  주왕의 호사스런 쾌락 생활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중국 史記의 은 본기(殷本紀)에 나오는 내용),

 

또한 소기름을 바른 쇠기둥을 숯에 달궈 사람이 그 기둥을 건너가게 하여 떨어져 타 죽게하는 잔인한 형별인 포락지형(炮烙之刑) 을 만들었다. 삼공구후인 구후(九候)와 악후(鄂候)가 이 악정을 말리기 위하여 주왕에게 충언하다 죽임을 당하고 소금에 절여 여러 제후에게 하사품으로 전해졌다.

 

이 젓갈은 주나라에도 하사품으로 왔는데 그것을 받은 창(昌)이 붕 우(朋友)였던 두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여 탄식하자 간신인 숭후호(崇侯虎)가 이를 밀고하여 유리(荽)라는 곳에 감금되었다. 문왕의 맏아들은 백읍고(伯邑 考) ‐ 둘째 발(發), 셋째 단(旦)의 맏형 ‐ 이었는데, 은나라 주왕을 찾아가 부친을 살려달라고 읍소하자 그를 죽여서 곰탕을 만들어 “성인(聖人)이라면 제 자식의 고기를 먹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아버지인 문왕에게 보내 먹도록 한다. 그러자 서백 창은 천하의 안녕과 주나라의 평온을 위하여 큰 절을 올린 후 자기 자식의 고기를 달게 먹는다.

 

서백 창은 감옥에 갇혀 있는 7년 동안 주역(周易)의 육십사례를 연구하여 길흉화복을 점치는 체계를 만들기도 했다. 이렇게 정리한 책을 주역(周易)이라고 했다. 서북쪽의 견융국(犬戎國)에는 좋은 말과 유신(有莘)에는 허리가 잘록한 여자들이 많았는데, 주나라 신하들은 유리에 갇힌 서백 창을 구하기 위해 명마와 어린 계집들을 골라 은 주왕에게 뇌물로 바치고 창을 구했다. 감

 

옥에서 풀려난 서백 창은 소유하고 있던 기름진 낙서의 땅을 은나라 주왕에게 바치고 포락지형을 폐지해 달라고 하여 많은 백성들의 민심을 얻었으며, 은 주왕 의 간신인 비중(費仲)에게 주나라의 진귀한 보물인 옥판을 내어주어 비중이 은 주왕의 신임을 얻게 함으로써 은나라를 망치게 하는 이간책(離間策)을 쓰기도 했다. 당시 비중은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아 주왕에게 바쳐 임금과 백성의 갈등을 조장하고, 주색에 빠지게 하는 주범이었다.

 

주왕은 자신의 숙부이며 은나라 최고의 인격자로 알려진 비간(比干)이 찾아와 덕정을 실행해 백성과 제후들을 보살피고 영토를 보호해야한다고 충언을 하다가 주왕에게 가슴을 열고 심장을 도려내는 형별을 받는다.

 

이 사건은 모든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는 기폭제가 된 것이다.

 

이를 가장 기뻐하는 사람은 달기를 이용한 미인계 등으로 오랜 세월동안 모든 과정을 진행해온 문왕의 셋째아들 단이었다.

 

이미 은나라 주왕보다 민심을 얻기 시작한 주나라 서백창은 오랑케 견융, 밀수국, 기국 등 주변국을 합병하고 간신 숭후호를 죽인다. 서백창 문왕이 죽고 아들 발이 무왕(武王)이 되었으며, 무왕은 강상을 사부로 삼고 국정을 다지며, 은나라 타도를 외치자 주변의 800제후국 들이 동조하였다. 은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출정하던 무왕은 황하를 건너기 전 은나라 주왕의 죄행을 낱낱이 성토하는 긴 연설을 하여 군사들의 사기를 복돋우었는데, 이 연설을 후세 사람들은 태서(泰誓)라고 하였으며 중대한 연설이라는 의미이다.

 

당시 주변의 고죽국(孤竹國)이라는 작은 나라가 있었다. 왕에게는 삼형제가 있었는데, 맏아들인 백이(伯夷)가 똑똑한 막내인 숙제(叔齊)가 왕이 되어야 한다며 가출을 한다. 그러자 막내도 가출을 하여 둘째가 왕이 되었다. 이들을 백이숙제(伯夷叔齊)라고 한다.

 

오랫동안의 방황 끝에 백이와 숙제는 서백 (西伯) 창(昌)이 노인을 잘 봉양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가 의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서백창은 이미 죽어 문왕(文王)에 추존되었으며, 그의 아들 무왕(武王)이 아버지의 위패를 수레에 싣고 은(殷)나라의 주왕(紂王)을 정벌하러 가는 길이었는 데, 백이와 숙제는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이렇게 간(諫)하였다.

 

“부친의 장례도 치르지 않고 바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효라 할 수 있는가? 신하된 자로서 군주를 시해하려는 것을 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무왕의 호위 무사들이 그들을 죽이려 하였으나, 강태공이 이들을 의인이라고 하며 돌려보내게 하였다.

 

무왕이 은을 평정하여 천하가 주(周) 왕실을 종주로 섬겼으나, 백이와 숙제는 그 백성이 되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다. 지조를 지켜 주나라의 양식을 먹으려 하지 않고,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꺾어 배를 채웠다.

 

그들은 굶주려 죽기 전에 이런 노래를 지었다.

 

“저 서산에 올라 산중의 고비나 꺾자구나. 포악한 것으로 포악한 것을 다스렸으니, 그 잘못을 알지 못하는구나. 신농(神農), 우(禹), 하(夏)의 시대는 홀연히 지나가고 우리는 장차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아! 이제는 죽음 뿐이로다, 쇠잔한 우리의 운명이여 !”.

 

역사 이전부터 백이와 숙제가 힘의 정치에 대한 부당성을 비판하였지만, 지금도 이런 정치 형태는 여전히 그 힘을 발한다. 이와 같이 정치를 하는데 있어 힘에 의지하는 것을 비유한 말로 이포역포(以暴易暴 (사나울 포 /써 이/사나울 포/바꿀 역/사나울 포)라고 하는데 폭력을 폭력으로 다스린다는 의미이기도 한다.

 

유가(儒家)에서는 이들을 청절지사(淸節之士) 로 크게 높이지만, 최근에는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뜻하기도 한다. 목야(牧野)의 전투에서 무왕 발(發)과 강태공에게 쫓긴 은나라 주왕은 녹대(鹿臺)에 올라가 마지막 술을 마시고 궁궐과 함께 분사하였다(중국 史記의 은본기(殷本紀)에 나오는 내용).

 

천자의 나라를 찬탈하여 대의명분이 필요했 던 발(무왕)은 타죽은 은 무왕의 시체를 끌고 와 하늘, 나라, 백성의 이름으 로 세발의 화살을 쏘고 그 목을 잘라 효수하였다. 사실 일등공신은 달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모르는 백성은 달기를 죽이라고 단에게 고한다. 결국 달기에게 큰 신세를 지게 된 단이지만 세발의 화살을 쏘아 죽이고 효수 한다.

 

덕이 높은 문왕은 현사들을 대접하고 등용을 했는 데, 나이 75세인 신갑 (辛甲)을 등용하여 태사(太史)로 삼았는데, 그는 문왕이 한때 사냥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자 하나라 우(禹)가 사냥에 빠져 부하에게 죽임을 당한 예를 글로 표현한 우인지잠(虞人之箴)이라는 시를 써서 문왕의 잘못을 바로 잡도록 권고했다.

 

또 상고시대의 전욱(顓頊)의 후손으로 단양에 살던 죽웅(鬻熊) ‐ 그는 나중에 초나라의 선조가 됨 ‐을 만난 문왕이 나이가 많다고 하자 죽웅 은 “신더러 노루를 쫓고 호랑이을 잡으라면 늙은 것이 확실하나, 앉아서 나라 대사를 논하라면 신은 아직 젊다”라고 하여 문왕은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본래 연제의 후손인 강상(姜尙)은 집안이 몰락하여 동쪽의 바닷가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70살이 되도록 허구한날 벼슬공부만 하고 가사를 돌보지 않자 부인이 집을 나갔다. 주의 문왕이 사냥을 떠나기 위해 무슨 짐승이 잡힐지 점을 쳤는데, 사람이 잡힌다는 점괘가 나온다. 사냥을 나간 문왕이 바로 위수 강가의 자천담(玆泉潭)이라는 연못에서 낚시를 하던 강상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가 바로 강태공(姜太公)인 것이다. 이때가 바로 나이 80이었다. 나중에 강가에 드리운 낚시가 바늘이 없다고는 것을 발견한 부하들이 문 왕의 아들 단에게 보고하자 단은 “고기를 낚은 게 아니라 세월을 낚은 것이네”라고 하였다고 한다.

 

강상을 얻은 주나라는 날로 강성해졌으며 문왕에 이은 무왕을 도운 강태공의 지략으로 결국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가 시작되었다.

 

무왕은 은나라 주왕의 이복 동생인 기자(箕子)의 현명함을 인정하여 한반도로 보내 조선의 왕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이때의 한반도를 고조선(古朝鮮)과 구분하여 기자조선(箕子朝鮮)이라고 하였다. 기자는 멸망한 은나라를 그리워 슬퍼했으며 그 후손들이 조선의 개발에 힘을 썼다고 한다.

 

강태공이 무왕에게 일러준 장수의 세 가지 덕목은 지금까지도 유명하다. “엄동설한에도 털옷을 입지 않고 병사들과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장수를 예장 (禮將)이라 하며, 험준한 길을 행군할 때는 장수가 맨 앞에 나아가야 하는 데, 이런 장수를 역장(力將)이라 하며, 군사들이 밥이 다 된 다음에야 장수가 식사를 해야하는 데, 이러한 장수를 지욕장(止欲將)이라 합니다”라고 하여 리더의 덕목을 말하였다.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는데, 무왕이 병들자 주공(周公)이라 불리던 무왕의 동생 단이 하늘에 있는 선왕의 영령들에게 형님 대신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기도를 하였다. 이 제사를 통하여 무왕이 차도가 있자 주공은 집에 돌아와 기도문을 ‘금등’이라는 금갑 안에 보관을 했다. 무왕이 죽자 열세 살 된 태자 송이 즉위하여 성왕이 되었고 주공이 섭정을 하게 되었으나 성왕의 숙부인 관숙, 채숙, 곽숙 등의 모함으로 상왕의 오해를 받자, 동남쪽의 초(楚) 나라로 내려간다.

 

주공이 도성을 떠난 후 궁정백관을 거느리고 빈 주공의 집을 들렀다가 금동 속의 기도문을 발견하고 눈물을 흘리고 주공을 모시고 왔다고 한다. 그러자 관숙이 주동이 되어 반란을 일으켰는데, 형제 간의 세력 싸움으로 비치는 것이 걱정이 된 주공은 전쟁을 치르기 전 어린 새끼 새를 보호하려는 어미 새의 마음을 표현한 치효(鴟鴞)라는 시를 써서 성왕에게 보냈다고 한다.

 

3년 동안의 반란을 토벌한 주공은 광활한 국토를 통치하기 위 하여 믿을 만한 친척들에게 새로운 점령지들을 나누어 주어 중앙정권을 보 위하는 제후국으로 삼았다.

 

제일 먼저 제후로 책봉 받은 사람은 주공의 맏아 들 백금(伯禽)으로 산동성 부근의 땅을 받아 노(魯)나라를 세웠다. 다음은 주 공의 아우인 강숙(康叔)이 땅을 받아 위(衛)나라를 세웠다. 성왕의 아우 숙우 (叔虞)는 융의 땅을 받아 당(唐)나라를 세웠는데, 나중에 아들인 섭부(燮父)가 도읍을 진수(晋水)로 옮겨 나라 이름을 진(晋)으로 고쳤으며, 이 진나라는 춘 추시대 가장 강력한 나라로 발전한다.

 

강태공은 주나라 왕실에서 오랫동안 태사(太師)라는 고위직에 있었는 데, 무왕이 사상부라고 하여 아버지같이 모셨는데, 주공은 산동(山東)성 지역을 둘러 나누어 하나는 백금에게 주었고, 강태공의 고향지역인 나머지 땅을 주었는데, 강태공은 거기에 제(薺)나라를 건립하였다.

 

출세한 강태공인 고향인 산동반도로 금의환향할 때, 출세 전에 자기를 버리고 떠났던 부인이 거지가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옛부인이 거두기를 바라자 강태공은 물 한 그릇을 길 위에 버리면서 다시 담을 수 없은 것이 우리들의 일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은나라의 주왕의 맏형인 미자 (微子)는 성품이 곧고 신의가 있어 주공이 하남성 일부를 주었는 데, 이것이 송(宋)나라이고 은나라 왕실의 후대를 이어나갔고 전국시대까지 800여년을 존속하다 제(薺)나라에게 멸망당하였다.

 

주나라 왕실의 친척이며 주나라 왕실 의 삼공(三公)인 주공, 태공, 소공 중에 무왕의 사촌동생인 소공은 과거 은나라의 땅에 연(燕)나라를 세웠고, 반란에 가담했던 채숙의 아들 채중(蔡仲)이 착하고 덕있는 행실로 살아가자 주공은 그에게 벼슬을 두고 채(蔡)나라의 제후로 삼았다. 초족(楚族)은 불의 신인 축융(祝融)을 말하는 데, 주공은 걸핏하면 반란을 일으키는 축융의 후손인 죽웅의 증손자인 웅역(熊繹)에게 형산(荊 山)의 남쪽을 추어 초(楚)나라를 세우게 했는데, 나중에는 주나라에 반기를 들고 춘추시대 남방의 가장 큰 제후국으로 성장한다.

 

이 모든 제후국들이 조공을 바치게 되니 이를 봉건제도(封建制度)라고 한다. 제나라는 현능한 현사들을 임용하여 개혁을 실시하고 투명한 정치를 하는 ‘패자(覇者)의 도(道)‘를 시행하여 빠른 시일에 강대국이 되었으나, 노나라는 친척을 중용하고 예의를 중시한 ’왕자(王者)의 도(道)‘를 행하였기 때문에 성장 속도가 느렸다.

 

패자의 도는 거현이상공(擧賢而上功)이라고도 하며 오직 현명하고 실력있는 사람을 중용하고 공로에 따라 상을 준다는 정책이다. 왕 자의 도는 존존친친(尊尊親親)이라고 하는 데, 높은 이를 높이고 친한 이를 친함으로 귀족들을 존경하고 친척을 중용한다는 의미이다.

 

7년을 섭정을 한 주공은 성왕이 아홉 살이 되자 왕권을 돌려 주었으며 둘은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였다. 이들의 깊은 정은 후세들에게 미담으로 칭송되었다.

 

주공은 섭정을 하면서 예악(禮樂)과 법도(法度)를 제정해 제도문물 을 창시하였다. 세월이 흘러 폭군으로 알려진 10대 여왕(厲王)은 이공(夷公)이라는 재무전문가를 채용하여 백성들로부터 과도한 세금을 거두기 시작했다. 격분한 백성들이 여왕에게 쳐들어 왔고 태자 정(靜)을 죽이려하자 소목공(召穆公)의 집에 숨어들었다. 그러자 소목공이 자기의 아들에게 태자로 위장하여 분노한 백성들에게 내어주어 대신 희생되게 하고 태자를 살려주었다.

 

여왕은 멀리 도망 가 14년간 숨어살다 죽었다. 나중에 소목공이 죽은 태자는 자신의 아들이었다고 밝혀 살아있던 태자 정이 선왕(宣王)으로 즉위 하였다. 선왕은 소목공을 재상으로 삼고 토지개혁을 하는 등 선행을 배풀었으나 말년에는 향락에 빠 져 폭정을 일삼았다.

 

여왕 때, 천자의 나라가 궁핍해지자 곡간을 열었는데, 그 곡간에는 하나라 때부터 1000년이나 간직되어 온 용의 침을 보관하던 괘짝이 있었다. 이를 개봉하자 용의 침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자 생리 중인 궁녀 오백을 불러 소리를 지르게 하니 도마뱀으로 변하여 도망쳐 어린 궁녀의 몸으로 들어갔다.

 

용의 침이 도마뱀으로 변하여 몸에 잉태한 궁녀는 50년이 지나 여자아이를 낳았으나 산길에 몰래 버린다. 길을 가던 부부가 이 아이를 구해 포(褒)라 는 지방으로 가서 기른다. 이때의 왕이 유왕(幽王)인데 주색잡기를 좋아했다. 포지방이 지진으로 조공을 바치지 못하고 미인을 바쳤는 데, 그 아이가 자라 포사(褒姒)라는 여자가 되었는데 조공으로 바쳐져 유왕의 후궁이 되었다.

 

그러나 포사는 어떤 산해진미의 음식을 갖다 주어도 그리고 어떤 호화스럼 속 에서도 웃지 않는 여인이었다. 유왕은 융족의 침입을 신속히 알리기 위해 만든 주나라 도성 주변의 봉화를 거짓으로 피우자 속아서 달려온 제후국 군사들이 황당해하거나 수라장이 되어 난동을 피우자 포사가 웃었다. 사실을 알게 된 제후들이 격분하였다. 몇 번의 이런 일들이 발생하자 제후국에서는 군사를 보내지 않아 봉화는 유명무실하게 되어 버렸다.

 

유왕이 왕후 신비를 폐위하고 포사를 왕후로 삼고, 태자 의구(宜臼)도 폐태자 시키고 포사가 낳은 백복(伯服)을 태사로 삼자, 왕후의 아버지 신후(申候)가 오랑케 견융의 도움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당황한 황제의 군사들이 봉화를 피웠지만 속아 온 제 후들은 아무도 오질 않고 견융족이 쉽게 궁궐을 함락하였지만, 유왕과 태자 를 죽이자 신후는 후회하고 제후들에게 호소문을 보내 군사를 지원받아 견융족을 쫓아낸다. 그리고 폐태자 되었던 의구가 평왕(平王)으로 등극한다. 그러나 견융족들이 계속 침범하여 수도를 호경에서 낙양으로 기원전 771년에 옮긴다. 결국 동쪽으로 이동하게 되어 서주(西周)는 없어지고 동주(東周)의 시대가 열린다.

 

그로부터 춘추전국시대가 열린다.

서주가 망할 날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예견한 정(靜)나라 환공(桓公)은 동변으로 가족과 백성을 이주시켜 정나라를 보존하였다.

 

 

***  참고자료 : 달기와 포락지형,  정말 달기는 포악한 여인이었나 ????

 

기원전 1100년경 중국의 상(은)나라 마지막 왕인 주(紂)의 폭정은 사마천(司馬遷)이 쓴 ‘사기‧은본기(史記·殷本紀)’에 기록되어 있다.

紂는 재능이 뛰어나고 힘도 장사였지만 술과 음악을 좋아했고 여색을 밝혔다고 한다. 연못을 술로 채우고(酒池) 고기를 나무에 매달아(肉林) 놓고 알몸의 남녀가 희롱하는 것을 보면서 며칠 밤이고 술을 마시고 놀았다. 

紂는 상나라의 서백(西伯)이었던 주(周) 문왕 희창의 큰 아들 백읍고를 죽인 후 국을 만들어 희창에게 먹게 하였다. 결국 주(周) 문왕의 둘째 아들인 무왕이 넷째아들인 주공 그리고 강태공의 도움을 받아 상을 멸망시키고 주(周)나라를 세웠다.

紂는 포악한 왕으로 잘 알려져 있다. 신하를 죽여서 포를 떠서 소금에 절였다. 紂의 숙부인 비간이 紂에게 올바른 정치를 할 것을 간하자 紂는 화가 나서 “성인의 심장에는 구멍이 일곱 개 있다더라”면서 비간의 심장을 꺼내었다. 

옛날에 읽어서 제목만 기억하고 있던 봉신방이 <中드>에서 <봉신연의(封神演義)>로 방영되고 있다. 상나라에서 주나라로 이행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으며 천하의 악녀 달기가 나온다.

달기는 기주(冀州)의 제후였던 소호(蘇護)의 딸로 천성이 착하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기주를 점령하여 부모와 백성을 모두 죽이고 남은 사람을 노예로 만든 紂를 죽이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紂의 총비(寵妃)가 된다. 紂는 달기의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들어준다. 

한편 달기는 紂로부터 도망가기 보다는 紂에게 처절한 복수를 하고자 다짐한다. 연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紂의 숙부 비간이 왕을 위해 특별요리를 가지고 와서 요리법을 설명하였다.
“살아있는 거위를 뜨거운 송진을 바른 긴 광목천으로 단단히 묶고, 30분 지나서 술 2되를 거위의 입으로 강제 주입한다. 그러면 거위의 피가 모두 발로 내려가면서 순식간에 거위의 발이 익는데 그때 거위의 발은 평소 보다 거의 두 배 크기가 된다. 그때 거위의 발을 잘라 요리한다” 


연회에 모인 사람들은 상을 찌푸리면서도 젓가락으로 거위 발 요리를 먹어보기 시작한다.

그때 달기가 한마디 한다.
“아무리 영(靈)이 없는 짐승이라지만 그냥 먹으면 될 것을 이렇게 괴롭히는 것은 너무 잔인한 것이 아닌가?”


왕숙은 동물과 인간은 다르다고 대답한다. “만물은 본디 존귀한 것과 비천한 것으로 구분된다. 늑대가 양을 먹고 양이 풀을 먹으며 사람이 백곡과 짐승을 먹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짐승은 영이 없는 그저 생물일 뿐이지만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별미를 탐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거늘 어찌 잔인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달기는 동물과 인간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며 또 다른 질문을 한다.
“이것이 잔인하지 않다고? 인지상정이라고? 그러면 사람을 저 숯불 위에 올려놓으면 어떨까?”
사람들은 저마다 중얼거린다.
세상에 그런 잔인한 일을 입에 올리다니. 그렇다. 동물에게 잔인한 행위를 거리낌 없이 한다면 그러한 잔인한 행위를 사람에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달기처럼 하게 될지도 모른다. 


달기의 생각은 거위를 잔인하게 죽여서 요리하기를 중지 할 것을 원했지만, 한편으로는 그와 같은 잔인한 짓을 사람에게도 하도록 紂를 부추기고 있다. 紂가 달기에게 물었다. “사람을 숯불위에 올리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런 잔혹한 형벌이 어떤 도움이 되겠는가?”

달기가 말한다. “숯불에 올릴 사람은 죽어도 마땅한 죄인들이다. 죄인을 불판위에 올려도 쉽게 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형벌이 있다면 나쁜 생각을 품은 자들도 무서워서 벌벌 떨 것이니 감히 누가 왕법을 어길 것인가? 모두 왕에게 충성하는 백성이 될 것이다. 아무도 죄를 짓게 되지 않으니 나중에는 그런 형벌을 쓸 일도 없을 것이다.” 

紂는 왕숙에게 그러한 형벌을 시행할 것을 명령하지만 왕숙은 너무 잔인한 형벌이라 못한다고 거절한다. 왕숙은 동물에게 한 잔인한 행위를 사람에게 똑 같이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달기가 질문한다. “왕법을 무시하는 자들은 짐승만도 못하지 않은가? 짐승을 잔인하게 죽여 먹는 것은 인지상정이라고 하더니 왜 갑자기 이렇게 자비로워 졌는가? 왕법을 무시하고 작당하여 사리를 취하는 자는 모두 벌을 받아야 한다. 겉으로는 충성하는 척하며 사사건건 왕명에 토를 달고 대왕을 기만하는 자들이 그 죄가 더 크다. 더하여 대왕을 미혹하고 남을 해치려는 자도 죽어야 된다”  

달기는 자기 부모와 기주 백성을 죽인 紂를 더욱 폭군으로 만들고 상나라를 멸망의 길로 유도한다. 紂는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될 포락지형(炮烙之刑)을 시행하였다. 숯불 위에 기름을 바른 구리 기둥을 가로로 걸쳐 달구어 놓고, 죄인을 그 위로 걷게 하였다. 모두 떨어져 숯불에 타 죽었다고 한다. 오리발바닥 요리 카오야장(烤鸭掌)이 포락지형(炮烙之刑)과 유사하다.

출처 : 데일리개원(http://www.dailygaewo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