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도시로 유명한 오스트리아 빈.
말만 들어도 설레이는 볼거리 많고 아름다운 관광 도시이기도 하다.
원시 시대부터 빈에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기원전 15년 쯤에 로마군이 경계선을 세워 “빈도나”라고 이름을 지었다. 게르만족이 거기를 차지할 때까지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고, 800년대 후반에는 마자르족이 빈을 통치하였다. 독일 황제군이 900년대 후반에 빈을 정복하였고, 1150년에는 바벤베르크 가문의 주요 관저가 되었다.
1273년에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루돌프 1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빈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자리로서 번영하였다.
교통의 요지여서 11세기에는 십자군의 통로로서 융성하였고, 15세기 이후는 신성 로마 제국의 수도로서 발전하였다.
전성기 시절엔 인구 250만을 넘나드는 대도시였다.
근세에는 오스만 제국군이 두 차례(1529년, 1683년) 빈 문턱 앞까지 왔으나 모두 저지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는 프랑스군이 두 번이나 빈을 공략하였다.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빈에서 《꿈의 해석》을 출간한 1900년경, 빈은 다소 고색창연하기는 하지만 우아한 대도시로 비쳐졌다. 도시 한가운데에는 성 슈테판 대성당이 우뚝 서 있었다. 대성당의 고딕식 첨탑은 바로크 스타일의 여러 교회를 보듬고 있었다. 법원 건물은 화려와 우울의 기묘한 결합이었다.[1] 황제는 여전히 접시 오른쪽에 은제 식기를 놓고 스페인 식으로 식사를 했다.[2]
제1차 세계 대전 후에는 오스트리아의 수도가 되었다.
1938년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자, 제2차 세계 대전까지 나치 독일군이 빈에 주둔하고 있었다. 전쟁 말기 소련군의 공세로 벌어진 빈 공세는 베를린 공방전 다음으로 치열하였다. 1953년까지 연합국(미국, 영국, 소련)의 점령 아래 있었다. 그래서 인구가 급격히 줄며 빈에 사람들이 여유로워 졌다.인구가 195만명 정도였는데 170만명 정도까지 줄었다.
1960년대 후반에는 오스트리아가 중립을 선포했다.
1990년대 중반에 오스트리아는 EU에 가입했지만 나토같은 연맹은 가입하지 않았다.
뭐니뭐니해도 빈을 가면 가장 먼저 찾는 곳이 쇤브룬 궁전 (Schloss Schönbrunn)이다. 독일어를 그대로 번역하면 "아름다운 궁전"이다.
과거 오스트리아 제국의 로코코 형식 여름 별궁으로 1,441개의 방이 마련되어 있다.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큰 궁전이자 방문객이 가장 많은 유적지 중 하나이며, 문화적으로도 가장 뜻 깊은 곳 중 하나이다. 쇤브룬 궁전의 정원은 한 시절 유럽을 호령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품격과 취향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50만평에 이르는 그 대지와 궁궐은 1996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선정되었으며 쇤브룬 공원 안에 있는 빈 동물원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동물원이다.
18세기 중엽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여름 별장으로 지어진 쉰브룬궁은 1892년부터 빈 13구역 히칭에 위치해 있다. 이 궁전의 이름은 1619년 마티아스 황제가 사냥하다가 샘터를 발견했을 때 'Welch’ schöner Brunn' (이 얼마나 아름다운 샘인가!) 라고 외쳤다는 일화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궁전 건물은 로마 양식으로서 인공적인 아름다움을 극대화하였으며 사치스러워 보이는 느낌은 피하였다. 안정적인 느낌을 가미하기 위해 정원을 만들어 여타 유럽 궁전의 정원과 비슷한 형태이다. 조각상을 세워 둔 정원과 본 궁전 사이에 글로리에테가 있다.
쇤브룬궁전 언덕에서 내려다 본 궁전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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